토픽 부동산

경매하다가 3년간 물린 이야기

회계사 · 불*******
작성일05.10 조회수664 댓글13

지난번에 하도 어그로를 끌었고 살짝 미안한 감도 있기에
굳이 시간을 들여 제가 망한 이야기를 써봤습니다.
이번 에피소드는 철저히 내가 멍청이라 물린것이므로,
다들 저를 조롱하거나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즐기세요

언제나 그렇듯 이 글의 모든 내용은 사실과 다르며,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면 단순히 우연의 일치입니다.

-----------

1. 타운하우스 붐이 한창 불던 10년도 후반의 일이다. 한참 경매의 늪으로 빠져들던 나는 종중땅 매매로 약간의 차익을 초단기로 얻는 경험을 하고, 자신감을 어깨에 견장처럼 올리고 다음 경매물건의 현장답사차 C시 J군 어딘가의 국도를 똥차를 끌고 달리고 있었다.

2. 그 땅은 약 8백평 정도의 임야로 거듭 유찰되어 최초감정가 대비 매각가는 반토막 아래였다. 조사서, 등기부, 물건명세서를 보면 근저당권과 가압류가 덕지덕지 붙어있었지만 낙찰시 내가 인수할 권리는 없었고, 용도구역지구 규제도 없고, 약간의 계관지역이 끄트머리에 있는, 차 한 대가 지날법한 직선 농로를 끼고 있었다.

3. 현장은 아주 고즈넉한, 전형적인 시골의 밭이었다. 뒷쪽으로는 야트막한 산을 등지고, 완만한 경사 아래의 평지에는 율무인지 수수인지 모를 작물들이 빼곡히 심어져 있었다. 늦여름의 바람이 이파리를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흔들었다. 평생 서울촌놈으로 살아온 나조차 공연히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삶을 동경하게 할 것 같은, 그런 땅이었다. 틀림없이 그 현장답사의 느낌은 내가 과감히 입찰하는데 한몫 했으리라.

결과적으로 나는 최저감정가보다 몇푼 더 붙이긴 했지만 약 00백만원 정도에 낙찰에 성공했고 등기를 마치자 그 땅은 공식적으로 내 것이 되었다. 한동안 출장 등으로 신경을 못 쓰다가 빠듯하게 시간을 내어 내 땅에 다시 찾아간 것은 해를 넘긴 한겨울이였다.

4. 내린 눈이 채 녹지 않아 듬성듬성 흰칠을 한 산이 멀리서부터 보이기 시작했고, 멀찍이 차를 세워놓고 천천히 돌아보던 나는 무성한 율무밭이었던 자리에서 작은 흙더미를 발견했다. 아니...가까이 가보니까 그것은 작은 봉분(무덤)이었다. 비석도 둘레석도 아무것도 없었지만 명백히 무덤이었다.

그 순간 그 고즈넉해 보이던 땅은 나의 족쇄가 되었다.

5. 토지를 가치로 본다면 묘지의 존재는 치명적이다. 법은 남의 땅이라 하더라도 그 땅에 묘지를 설치하고 이를 유지한다면, 관습법상 지상권과 유사한 권리를 인정한다[분묘기지권].

심지어 이 권리는 무덤으로 보이는 형태만 있으면 등기나 어떠한 공부상의 표시도 필요 없고, 타인의 토지에 무단으로 설치해도 20년간 그 묘지를 점유하면 취득이 인정된다.[시효취득]

쉽게 말하면 내 800평 땅은, 고작 10평도 안되는, 언제 누가 어떤 이유로 묻힌지도 모르는 무덤 하나때문에 옴짝달싹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차라리 끄트머리에 있었으면 구획정리를 통해서 잘라내고 말았겠지만 이 묘지는 임야의 가장 좋고 평평한 위치에, 깜찍하게도 키큰 농작물 사이에 숨어있었다.

아니 어떤 미친자가 무덤 주변에다가 작물을 심어? 그걸 냅둬?라고 남탓을 해봤자 어차피 아무것도 해결해 줄 수 없는 공염불이고 현장답사에서 캐치하지 못한 내 잘못이 사라지는것도 아니었다.

참고로 이 경매에 들어간 자금 대부분은 경락자금대출로 이미 이자를 내고 있었다. 물론 대출이자가 이것만 있을리도 없지.

나는 불현듯 "마션"의 첫 구절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ㅈ됐다.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나는 ㅈ됐다."

6.
경매책이나 케이스 스터디에서는 당연히 기본값으로 주어지는 정보들이지만, 당장 낙찰자인 나는 J군 N면의 가가호호를 샅샅이 뒤져 이 묘지 주인이 누구인지, 만들어진지 얼마나 되었는지, 대체 누구를 찾아가야 이 사실을 알 수 있는지를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방법으로 시간을 태워가며 실행해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그때부터 율무농사 주인을 시작으로 나의 숨은그림찾기가 시작되었다. 어색한 인사, 경계심, 동네 노인 특유의 장광설, 수십박스의 비타오백, 수백리터의 휘발유, 수천번의 자책들. 이 지리하고 답 없는 과정은 상상에 맞기도록 하자.

7.
지리한 탐문조사 끝에 결국 이 묘지의 주인(연고자)가 없는 것으로 잠정 결론이 났고, 다음은 절차였다. 군청에 개장(改葬, 묘를 옮김)하겠다는 서류를 접수하고, 사복과 공무원과 답사를 하고, 개장허가를 받고, 연고자가 있는지 일간지에 공고를 하고... 수많은 행정절차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각 절차마다 최소 1개월에서 3개월의 시간들이 끼어 있었다.

공고일 이후 3개월간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나는 개장허가를 받아 이 지긋지긋한 무덤을 치워버릴 수 있었다.

이미 낙찰받은 뒤로 해가 두 번이나 바뀌어 있었다.
이제 귀농귀촌이고 시세차익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포기하고 싶었다. 감정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데 나는 2년이 지나는 동안 해결 안 되더라.

8.
그러나 얄궂게도 이 묘의 연고자가 나타났다는 연락을 장묘업체로부터 받은건 d-day를 한 달 정도 앞둔 시점이었다. C시 터미널 근처의 커피숍에서 만난 그는 환갑 전후로 보였고, J군을 떠나 객지생활을 하다가 고향 동창의 연락으로 묘를 옮기려는 연락을 받게 되어 달려왔다고 하였다. 그는 좁은 커피샵이 쩌렁쩌렁 울리게 어떻게 울 어머니 무덤을 파헤칠 천벌받을 짓을 하냐고 나를 윽박질렀다.

그 소중한 어머니 무덤에 주변에 남이 밭을 일굴동안 내버려둔 사람과 내 앞에서 인륜을 논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인가?

물론 이 말은 입밖에 내지 못했지만.

9.
현실적인 문제는 이 연고호소인(?)의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그 '울 어머니'가 이사람의 모친인지, 그 율무밭 한가운데 누워 계신게 맞는지, 이 사람이 그 묘지의 유일한 적법한 연고자인지... 증명할 수 없는 장구한 토론을 시작한다면... 또 다시 아득한 시간이 내 눈 앞에 가로놓일 것이 명확했다.

무엇보다 나는 이제 내 시간과 정신을 야금야금 좀먹는 이 땅을 그만 놓아주고 싶었다. 그가 이장을 하지 않겠다며 다시 버티기 시작하면 또 다시 지루한 지옥의 시작일 것이고, 그가 연고자가 아님을 증명하는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돈 이야기로 들어가자. 보통 묘의 이장료의 시세(?)는 200만원이지만 나는 그냥 오백만원을 불렀다. 대신 조건은 연고자가 연락한 사실은 없던 걸로 하고, 해당 묘지는 2주 뒤에 무연고묘지로서 개장, 화장 및 안치절차가 진행될 것이며, 그 이후에 어머님(?)을 좋은 곳에 모시면 되지 않겠냐는 이야기였다.

그는 그걸로는 부족하다며 1천만원을 이야기했고 어찌어찌 아쉬운 소리 끝에 상담은 8백만원으로 종결되었다. 나는 그자리에서 바로 돈을 건네었고, 우리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그 뒤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0.
연차를 몇개 태워먹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개장하는 날에 나는 또 그 땅에 가 있었다. 장례업체가 부산하게 토지를 정리하고, 땅을 파고, 뼈인지 흙덩어리인지 모를 무언가... 지금 떠올려보면 그건 묘를 파헤친다는 "파묘"의 기괴함보다는 기계적인 토목공사에 더 가까웠다.

몇 가지 서류를 위한 증거 사진들은 벌건 대낮의 태양덕분에 더없이 선명하게 찍혔고, 개장완료신고서를 군청에 제출하고 나서 모든것이 끝났다.

울 어머니를 위해 8백만원을 가져간 아들은, 이후에 개장일정과 관련된 문자를 한 번 보냈으나 답장은 없었고, 그 날에도 오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그가 진정한 연고자인지, 고인의 아들이 맞는지 알지 못한다.

11.
경매로 시작했으니까 돈 이야기로 돌아와서, 결과적으로 이 건은 거의 3년에 가까운 세월, 경락대출이자, 수많은 경비, 노력, 감정적인 절망을 거쳐 온전히 내 것이 되었고, 그 이후로 또 수 개월 정도의 시간을 들여 다행히도 낙찰가를 크게 상회하는 가격에 무탈히 매매할 수 있었다.

모두 정산해보니 내가 3년의 시간을 들여 얻은 돈은 고작 천백만원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돈으로 셀 수 없는 부분들을 감안하면 명백히 적자일 것이다.

그렇게 3년간의 경매는 끝이 났고,
뒤돌아보니 허탈한 마음에 살짝은 눈물이 났지만
인생의 경험이라 좋게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

언제나 당부하는 잔소리하고 끝낼게요.

경매는 물건을 싸게 사는 수단이 아닙니다.
경매는 돈을 적게 주고 살 수도 있는 수단일 뿐입니다.

(실무상 참고)
1. 2001년 1월 13일 이전 설치된 분묘는 분묘기지권의 제한이 없으며, 그 이후는 20년입니다.
2. 2021년 판례로 분묘기지권에 대하여 지료를 요구할 수 있고, 판결 또는 협의에 의한 지료의 청구를 2년간 지연한 경우 토지소유자는 분묘기지권의 소멸을 청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상세 내용은 법률고문과 상담하세요. 저는 전문가가 아닙니다.

댓글 13

코리아이플랫폼 · 빗*

ㅋㅋㅋ 저번 글부터 잘쓴다 독서 자주하는 사람같넹 ㅋㅋ 잘읽고 배우고 감

감정평가사 · !*******

어우야

새회사 · i*********

다들 주식이 어렵다 무섭다 하지만 부동산 제대로 물리거나 고생한걸 못봐서 그럼. 주식이랑 비교도 안되게 고통스러울거임

새회사 · l********

저번에도 못난글 싸더니 자주 보이네
차단박을게 수고행

아 이번 글은 안읽었엉

한국교직원공제회 · d*****

앜ㅋㅋㅋ 특수물건은 진짜 한번 잘못 걸리면 2~3년은 우습게 애먹이더라고 ㅋㅋ

NH농협 · !*******

잘 봤습니다..일이 대출쪽이다보니..선배들 중 경매를 보는사람이 많은데 요즘은 다음이나 네이버 지도에서도 어지간하면 분묘 형태는 보입니다..선배들 중엔 임야도 산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사람도 있구요..돈을 떠나 값진 경험을 하신거 같네요..

LG화학 · 꼬**

글을 진짜 잘쓰시네요
하나도 지루함이 없었고, 잘 읽었습니다.
저도 경매에 관심이 많은 1인인데, 많이 배우고 갑니다.

새회사 · l********

경매 관심 있어서 우연히 보게됐는데 글을 정말 잘 쓴다. 책 페이지 넘기면서 읽는 것처럼 재밌게 읽었어. 정말 맘 고생 많았겠다.. 그래도 결론적으론 잘 해결됐으니까 다행이야!!!!!

인기 채용

더보기

부동산 추천 글

토픽 베스트

나들이 명소
암호화폐
성격유형
블라마켓
유우머
OTT뭐볼까
암호화폐
보험
반려동물
TV·연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