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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쌍용C&E · 딸******
작성일2022.03.29. 조회수343 댓글3

대략 10년 전 이야기.

난 군대를 전역하고 이제 막 복학한 복학생이었다.

군대에서의 다짐 중 하나는, 복학을 하면 국어국문학을 꼭 복수전공 하겠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 다짐대로 복학하자마자 국어국문학 복수전공을 신청해서

국문과 전공수업들을 듣는 중이었다.

때는 마침 봄이어서, 원체 넓고 아름다운 벚꽃이 많기로 유명한 교정은 한 껏 들뜬 분위기로 가득했다.

나는 개론 수준의 국문과 전공수업을 수강 중이었는데,

복학생인 데다가 다른 과 전공을 듣는지라 수업에는 아는 사람이 전무했고,

다소 외롭게 수업을 들어야만 했다.

그렇게 아무 일 없이, 종강일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한 여학생이 눈에 띄었다.

한 학기 내내 같은 수업을 들었는데,

바로 그 날, 그 여학생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계기는 단순했다.

그녀는 출입문 근처에 앉아있었는데,

수업에 늦게 들어온 녀석이 강의실에 들어오면서 문을 열어둔 것이었다.

이에 그녀는 총총 걸어가서 문을 닫고 단정하게 다시 제 자리에 앉았는데,

그 모습이 눈에 확 띈 것이다.

그 사소만 몸짓에 나는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기울어져 버렸다.

하지만 나는 연애를 해본 적도 없었고, 누군가에게 고백을 제대로 해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몇 번의 수업이 더 진행되는 동안, 그녀에게 자꾸 눈길이 갔지만

더이상 다가갈 용기는 없었다.

그렇게 기말고사 기간이 다가오고, 친구와 함께 도서관에서 밤샘 공부를 하다가

친구에게 이 사정을 얘기했다.

그러자 친구는 이렇게 응수했다.

"마, 그냥 질러라. 그거 안 그러면 니 후회한대이."

"됐다.....치아라....."

친구의 응원 아닌 응원에도 난 더이상 용기를 낼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기말고사를 치르는 날, 교수님은 시험에 앞서 우리에게 대학생활에 대한 조언
(신입생들이 주로 듣는 개론 수업이었으므로)을 해주고 있었다.

그때, 친구로부터 문자가 왔다.

"어때, 말이라도 걸어 볼끼가?"

"아니..... 안한다고....."

그러자 친구가 짤막한 문자메세지를 덧붙였다.

"우물쭈물 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 조지 버나드 쇼"

'뭐라카노....'

난 다시 교수님의 말씀에 집중했다.

그리고 교수님이 말했다.

"여러분, 마지막으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조지 버나드 쇼라고, 아일랜드의 극작가가 자기 묘비에 이렇게 남겼어요. 우물쭈물 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여러분, 앞으로의 대학생활에 많은 기회가 찾아올 겁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무의미한 패턴 속에서 의미를 찾는,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주인공

존 내쉬처럼, 친구의 메세지와 교수님의 조언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시험을 제대로 치르기 어려웠다.

이 수업은 기말고사를 치르고 나서 종강을 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녀를 다시 한 번 볼 기회가 있었다.

나는 편지에 짤막하게 글을 써서 다음 수업에 그녀에게 건네줄 요량이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불쑥 이런 쪽//지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부담스러우실 것 같지만, 오후 5시에 인문대 학생회관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저와 잠시 얘기 나누실 수 있을까요? 제 번호는 000-0000-0000입니다. 안 나오셔도 좋습니다. 부담 갖지는 말아주세요."

종강일, 나는 수업이 끝나고 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심장이 콩닥거려서 말이 제대로 안 나왔다.

잠시 '우물쭈물' 하다가, 결국 쪽//지를 건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갑자기 이런거 드려서 죄송해요. 내용 보시고, 맘에 안 드시면 그냥 무시하셔도 돼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인문대 학생회관 카페로 향했다.

내가 편지에 적은 시간까지는 세 시간이나 남았다.

나는 캐모마일 차를 주문했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4시 50분. 그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5시 정각. 그녀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실망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읽던 책이나 마저 더 읽을 생각으로 조금만 더 있다가 가기 위해 짐을 정리했다.

5시 10분. 그녀가 왔다.

"저기......"

" ? "

나는 크게 소스라쳤다. 시간이나 맞춰 왔으면 놀라지는 않았을텐데

약속시간이 지나고 완전 무방비 상태에서 그녀가 나타난 것이었다.

약속시간에 늦은 것은 아마 고민의 결과였으리라....

나는 멋쩍게 그녀를 맞으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틀 뒤, 학교 밖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

그녀는 이틀 뒤에도 나와줬고,

나는 그사이 너무 흥분하고 긴장한 상태로 보냈는지

그녀 앞에서 찻잔을 테이블에 엎고, 말을 더듬거리며 대화를 잘 이끌어 가지 못 했다.

------------

이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다.

나는 그 해 월드컵을 결국 혼자 보게 되었다.

내가 그녀에게 무례했던 건 아니었을까 잠시 고민스런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다만 그때의 기억만큼은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버렸다.

친구의 문자메세지와, 교수님의 조언이 빚은 기막힌 우연.

며칠과도 같았던 몇시간의 기다림.

향긋한 캐모마일의 향기.

-----------

마른 꽃잎이

뜨거운 물에 풀어지는 오후

귀를 기울이자 그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름의 경계에 피는

가을의 꽃과

기다림의 우연

 

어제의 일기예보는 빗나갔고

그래서 오늘은

때 묻은 고양이가 제 발을 핥고

사람들은

어느 극작가의 비명碑銘을 노래했다

 

모든 공전하는 것들의

망설임과 그리움

그 궤도에서

연못의 인공분수에 뜬 무지개의

사소함으로

그대에게 추락하는 일,

어쩌면 나는 부서지지 않고

그대와 함께 왈츠로 자전하는 일

이 모든 사건을 우연이라고,

부르고 싶다

댓글 3

새회사 ·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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