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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원과 수녀님의 암투병, 그리고 죽음

삼성SDS · 그*****
작성일2019.12.22. 조회수1,770 댓글7

19년을 고아원에서 살면서 작성한 나의 수기는 어쩌면 내 본위의 이기적인 토로에 불과할 수 있다. 나는 단 한명의 고아로 살면서 나를 지배했던 고아원의 공기를 원망했을 뿐, 나와 함께 살았던 어른들의 고통에는 무지했다.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어렸을 때는 몰랐고 좀더 커서는 그를 변명했으며.. 더 커서도 나는 그저 내 행위를 정당화하기 바빴다. 이제와서 세례명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수녀님은 그렇게 고아들을 위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중학생이 되어 몰래 오가던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주변의 골목집 분식집은 고아들이 들락거려도 맘씨좋게 봐주었던 주인 아주머니와.. 아주머니의 목소리 큰 친구분밖에 없었다. 나는 모범생의 특권으로 허술한 출입 체크를 속여가며 분식집에서 찰떡빵과 어묵을 한창 얻어먹고 있던 참이었다.

그 때 허름한 천막을 뚫고 수녀복 특유의 엄숙한 슬라이와 회색의 천을 걸친 사람이 나타났다. 내가 움찔하며 몸을 어묵상자들 사이로 숨겼던 것은 당연지사였다. 세례명을 알 수 없는 그 수녀님의 곁에는 흰색의 환자복을 입고 눈썹이 없는 사람이 함께 있었다. 모나리자를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솔직히 에일리언 같기도 했다.

우리들만 아는 아지트를 들킨 기분은 매우 좋지 않았다. 그동안 즐긴 재미를 포기하고 몰래 천막을 들춰 자리를 옮기려는 찰나 환자복 에일리언이 우리를 잡았다.

"*** 애들이니? 나도 침방 수녀님인데.. "

말하는 폼이 흡사 여고 졸업생을 붙잡는 교사였다. 그녀는 정녕 은퇴한 교사들처럼 아파보였고 앨범의 추억처럼 아련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고아가 인근 상인들이 장사하는 자리에서 구걸해 먹었다는 것을 들키는 건 더 큰 일이었다.

"그런거 몰라요, 아씨, 기분 잡쳤네.. "

그것이 내가 진짜로 말한 말이었고, 나는 불량배마냥 거칠게 욕을 내뱉으면서 도망쳤다. 무슨 수녀님이길래 슬라이도 안쓰고 비니모자를 썼는지는 몰라도 일단 들키지 않는게 중요했다. 그 수녀님이 한달도 안되어 암으로 부고를 맞이했다는 것은 그때는 예언자가 아니었으므로 몰랐을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한달이 지나 어떤 수녀님이 암투병으로 소천했고 그의 추모미사를 할 때에도 나는 분위기 파악을 못했다. 그저 친하지도 않은 누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짜증났을 뿐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내게도 소중한 사람이 생기고, 그 사람이 나를 소홀히 할 때 느끼는 아픔을 느끼면서 언제인가부터 나는 그 이름모를 수녀님께 죄책감을 느꼈다. 죽음이 한달도 남지 않은 그 수녀님이, 마지막으로 했던 외출에서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살면서 나는 종종 내가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수녀님을 생각하며 단 한방울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나는, 그 통곡의 순간에서 정녕 하이드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제와서 미안하다고 하는게 의미가 있을까? 평생을 고아들을 위해서 애써왔던 늙은 수녀님께는 어떤 말도 지금은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솔직히 고백한다. 고아였던 나는 결코 선한 사람이 아니고 이기적인 한 인간이었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악은 평범하고 인간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고아원

댓글 7

새회사 · 미*******

오랜만이네 형 글. 잘 읽었어. 자책하지 말자 사람 사는게 다 그렇지 뭐. 지금 주변 사람들에게 잘 하면 돼. 설령 그러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해. 중요한건 마음이지, 타인을 향한 지향이고 태도라고 생각해. 좋은 밤 보내 😊

삼성전자 · l*********

그런것조차 끌어안을 정도의 희생과 그릇이었기에 칭송받는 성직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에스엘 · 옆************

초라한인간이며 평범한 악을 극복하려하기에.. 인간은 아름답습니다.
아멘

자생의료재단 · 한*****

난 사실 배풀고 싶지않아 난 그수녀님같은 좋은 사람이 아니거든
당장내가힘들면 다른사람은 보이지 않더라

판토스 · 1********

나의 현재상황이 가장 바닥이고
가장 불운하다고 느껴지는 상황에서 그 누구를 마음 한켠에 방하나 내어줄 수 있단 말인가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원래 선하다하지만
그게 상황에 비례하지 않을까

크리스마스 맞이하야
돌아가신 그 수녀님을 위해 화살기도라도 드리자
형은 괜찮아 적어도 지금까지 이런맘을 가지고
있잖아
메리크리스마스

새회사 · 남***

형. 우리가 그렇게 보잘 것 없는 맘으로 살아! 그 누구도 천사가 아닌 인간일 뿐이거든 그래서 우리에겐 신이 필요할지 몰라. 메리크리스마스

공무원 · 김**

오랫만입니다~ 즐겨읽고있으니 계속 연재 부탁드려요. 선함은 노력으로 만들어지는거니까... 수녀님도 아시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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