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원
나는 미혼모의 아이로 19년의 세월을 고아원에서 보냈다. 그말인즉슨 나는 19년동안은 돈 한푼 내지 않고 내 한몸 뉘일 수 있는 곳을 제공받았다는 것이다. 그안의 삶이 어떠하든, 내게는 집이 있었다. 여름에는 햇빛을 피해 미지근한 보리찻물을 먹으며 더위를 식히고, 겨울에는 텅텅 소리를 내는 라디에이터 옆에서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건 감사할 일이었다. 그건 당연하지 않은 축복이었다. 그걸 그땐 당연하게 여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참 배가 불렀던 고아였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유예받았던 퇴소를 목전에 두었다
삼성SDS · 그********
나는 미혼모의 자녀로 19년을 고아원에서 자랐고 그리고 내 고아원 동기들은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사는 녀석들이었다. 누구는 내가 이렇게 글을 쓰면, 니 동기들의 삶을 네가 어찌 재단하느냐고 펄쩍 날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내가 내 동기로부터 직접 들은 말이었다. 성년이 될 때까지 결코 누구도 사랑할 일이 없었던 나와 다르게, 내 친구들과 동기들은 누군가를 피 뜨겁게 사랑하고 원했다. 그 결과는 결코 아름답지 못했음에도 아직도 그게 좋았노라고 말하는 녀석들이 나는 아직까지 한심했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기
삼성SDS · 그*****
나는 미혼모의 자녀로서 기인해 태어나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부모없이 자랐다. 내가 태어나서 최초로 무엇을 보았는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태어나서 내 부모를 보았던 적이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나는 내 이름을 지어준 간호사만큼은 명확히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다들 예상했던 바와 같이 나는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서 많이 회의적인 편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 듣는다면 다들 적든 많든 어느 정도의 불쾌감을 드러내었다. 그 이유가 내 사랑이 어느 누구의 고통이나 슬픔을 빚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들이는 리소스 대비
#22 랑 #고아원 각각 BCG랑 삼성SDS 다니는 사람인데 #22는 어느순간 그동안 쓴 글 다 지우고 사라지심 ㅜㅜ 왜인지 이유 아는 사람? 그리고 저 두 분처럼 글 잘쓰는 사람 알면 댓글로 태그 알려줘
서울특별시 · l*********
나는 유년기의 19년 동안의 세월을 고아원에서 보냈고 그 덕에 일반적인 가정의 모습을 모르는 채로 평생을 보냈다. 나는 초등학생 때 내 이름을 지어준 간호사를 만났고 그 때 내 생모를 아주 조금이나마 그려볼 수 있었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시설에서 정해주는 공고에 입학할 때, 나는 복지사로부터 어떤 사람들에게는 어머니를 한번도 만나보지 않은 것이 축복일 수 있다는 이야길 들었다. 그후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은 그 명제 하나를 증명하기 위함이나 다름없었다. 그 때 그 사람이 내게 잘못 말한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아
나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를 모르는 자식이었고 내 엄마는 미혼모였다. 내게 있어 내가 자랐던 가톨릭 고아원 재단 산하에 병원과 미혼모 시설이 같이 있었다는 것은 내 삶의 첫번째 행운이었다. 내 생모가 떠나도 내 이름을 지어줄 간호사가 있었고, 나를 측은히 여길 수녀님이 있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운이 좋은 것이었다. 그들의 가호 아래 나는 좀 힘들 수 있어도 희망찬 유년시절을 보냈을 수 있었다. 다시금 생각해 보건대 아직도 감사할 분들이 참 많았다. 그러한 유년 시절을 보내고 막 성인이 되었을 무렵, 나는 철이 없었고 때문에 누군
8주차였던 지지난주에 심장소리를 들었을 때 글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어요. 안도하면서도 걱정되면서도 기쁘면서도 불안하고, 사람에게 열가지 감정이 있다면 아홉가지가 다 느껴지고 백가지가 있다면 아흔 아홉가지가 느껴지는 그런 거였죠. 그 때 느끼지 못한 한가지 감정을 오늘 느끼고 있답니다. 의사 선생님이 처음에 오늘부터는 배로 초음파보자고 했을 때까지 행복했지요. 그 때 들렸던 영상 녹화 시작소리도, 간호사 선생님의 미소도 다 밝았어요. 그 뒤로는 차마 표현하기가 싫네요. 어찌저찌하다가.. 다음주에 수술해서 아기를 보
먼저 나에 대해 간략히 써보자면, 수녀원이 운영하는 고아원 산하의 미혼모 시설에서 태어나서 19년을 고아원에서 보낸 사람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성장기동안 일반적인 가족을 경험한 적이 단 한번도 없는 사람이다. 아니,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 표현도 틀렸다. 나는 그냥 가족이란 걸 모르는 것 같다. 어떤 가족이 일반적인가, 아닌가 판단할 수도 없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우리에게도 가족 비슷한 것이 있었다. 우리 고아원은 수녀원이 운영했는데, 이삼십명의 동년배 아이들이 한 방에서 자랐고 그 방을 침방이라고 불렀다. 방을 담당하는
나는 태어날 때부터 고아원에 있었다. 성장한 뒤에 알게 된 사실인데, 내 어머니는 미혼모로, 수녀원 산하의 미혼모 시설에 있다가 나를 낳고 퇴소하였다. 내 이름은 내가 태어난 병원의 간호사가 지어주었고 나는 그 후 19년 가까이 고아원에서 살았다. 우리 고아원은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이었다. 고아들이 자라는 방 한개를 침방이라 불렀고, 각 침방에는 침방 수녀님이라는 관리자가 붙었다. 아주 어렸을 때에는 그를 엄마라 불렀다. 그러나 좀더 자라, 우리의 처지를 실감하게 되었을 때부터 나는 엄마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 이유
나는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나 19년 동안 고아원에서 자랐다. 현실에서는 갖가지 이유로 이를 굳이 말하지 않지만 익명의 세계에서 나는 그동안 숨죽여 말하지 않았던 이런 이야기를 언제나 말하고 싶었다. 우리 고아원은 국내에서 꽤나 큰 규모의 아동복지시설로, 갓난쟁이를 돌보는 영아원에서 고교생까지 커버하는 요람이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 요람은 언제까지나 고교생까지였지 대학생을 반기는 곳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어른들이 말하는 싹수가 보이는 아이였다. 독서를 즐겨하고 책에서 본 글귀로 어른들께 잘난
나는 미혼모의 아이로 태어나 19년을 고아원에서 살았다. 내가 고아원에서 있었던 그 시절은 격동의 시대인 1980년 후반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였다. 학교 폭력이 미화되던 시대였으며 동시에 반항하는 청춘이 모든 스크린을 장식했던 순간이었다. 누군가 그 시대에 고아원에서 한점의 폭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 순수함을 되도록 지켜주고 싶다. 폭력은 어설프게 아는 것보다 아예 모르는 편이 나으며, 나이들 때까지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은 찬탄할만한 행복이다. 내가 겪었다고 모두가 그 진흙탕에 빠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조
나는 수녀원 산하의 미혼모 시설에서 몸을 푼 미혼모의 아이였다. 몇몇 사람의 기대와는 다르게 나는 태어나서 내 생모의 얼굴을 한번도 본적이 없었으며, 심지어 단 한번도 그리워 한적도 없었다. 물론 그녀는 출산 직후 나를 보았을 수는 있었겠지만 그것이 무슨 대수였겠는가. 삼십년 가까이 나를 찾은 적 없는 사람은 결코 내가 자신을 찾는 것을 바랄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혈기 넘치는 십대 후반까지 나는 헛된 희망을 품었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선 나는 감히 말한다. 나는 이제는 의연하다고. 중고등학생 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내가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나 19년을 고아원에서 자라면서, 가장 정의하기 힘든 관계는 바로 수녀님과의 관계였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내게 수녀님은 자비로운 성모였고 잔인한 블러디 메리이면서 때로는 완벽한 타인이었다. 중국 극술의 한 종류인 변검술을 아는가? 그것을 보면, 단 1초만에 수개의 가면이 바뀐다. 그 광경을 성인이 되어 보게 되었는데 우습게도 나는 그를 보며 어렸을적 수녀님들을 떠올렸다. 우리 고아원은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으로, 8살 이전에는 한 보육사와 수녀님이 몇년을 한 아이를 기르다가, 그 아이가 8살이 되
나는 19년을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엄마 아빠라는 말보다 수녀님이라는 부름을 백배는 더 불렀을 것이다. 처음엔 수녀님을 엄마라고 불렀다. 그 후 엄마라고 부르지도 수녀님이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를 지속했다. 어느날부터 나는 다시는 수녀님을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중학생 때 만났던 수산나 수녀님이 몸소 가르쳐준 사실 때문이었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하고자한다. 나는 그 학년에서 가장 공부를 잘했던 고아였고 그래서 고아원 후원회에서 가장 후하고 좋은 견진 대모님을 만나게 되었다. 견진성사를 앞두고 만난
나는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나서 19년동안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성장하면서 겪었던 시간 중에, 아프고 쓰릴 때도 있었지만 은근하게 그리운 시절도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 시간들을 떠올리면서 울고 웃고 한다. 우리 시설에는 내가 짐작치 못할 유구한 전통이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여름날이 되면 고아원 원생 중 일부를 뽑아 양산의 대단위 밭으로 작업을 보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중학생 고학년 이상의 시설 원아에게 고추밭과 같은 밭일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다. 실제로 내게도 그랬다. 왠만한 밭일은 힘들지 않
나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갓난쟁이일 때부터 고아원에서 자랐다. 나중에 알고보니 내 생모가 미혼모였고 수녀회 산하의 미혼모 시설에서 나를 낳았다고 한다. 그 사실이 가슴아프다던가 못내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나는 해가 뜨고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그저 태어나서 살았을 뿐이었다. 장성하여 퇴소하고도 한참 후에야 나는 내가 고아원에서 자란 고아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항간에서 흔히들 그리는 고아에 대한 이미지를 알고 나서 깜짝 놀랐는데,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과 그 이미지는 뭉크와 클림트의 그림 만큼의 간극이 있었
나는 태어날 때부터 고아원에 있었고 아직까지 내 삶을 헤아려도 고아원에서 내 생애의 절반 이상을 보냈던 그저 한 아이였다. 그리고 나는 내가 글을 읽을 수 있던 시절부터 내가 미혼모의 아이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의외일수도 있겠지만 나는 내 처지 때문에 슬펐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단편적으로 말하자면, 어느날 내가 슬프고 아팠다면 남들 다 먹는 과일 간식이 내게는 못먹을 썩을 것이 제공되었다던지, 내가 하지도 않았던 것때문에 억울하게 체벌을 받았다던가, 뜬끔없이 무엇 때문에 받게 된 단체체벌이 서러워서였었다. 그외에 슬펐던 일
나의 엄마는 미혼모였고 나는 가톨릭 수녀원 산하에서 운영하는 미혼모 시설에서 태어났다. 고아원에서도 계급을 나눈다면 아마 아래에서 제일일거다. 골품제도로 따지자면, 태어날 때부터 고아원에서 자란 성골 고아라고 할 수 있겠다. 가끔 내가 은근히 자조하는 비유이다. 그런 내가 자란 우리 고아원은 폐쇄적인 고아원이어서 초중고교를 법인에서 모두 다 같이 운영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또래 바깥 사람들을 만날 일이 좀처럼 없었다. 그렇게 같은 나이의 고아원 동기가 100명 정도 하는 대단위 고아원 안에서
내가 19년을 고아원에서 지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자면, 몇가지 기억들을 생각하면서 고민하겠지만.. 가장 잊혀지지 않는 행복한 순간은 단연코 그 날일 것이다. 어느 해의 어린이날이었다. 우리 고아원에서도 어린이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전날부터 만국기를 붙인 운동장은 녹음과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우리는 새벽부터 설레어서 하얀 새벽녁이 밝아올 무렵이면 체육복을 입고 팔딱팔딱 뛰었다. 그렇게 오전 8시가 되면 어린이날 기념 운동회를 했는데, 전국에서 찾아주신 후원자분들이 있어서 그런지 전혀 쓸쓸하지 않았다. 장애물
나는 미혼모의 아이로 태어나 첫 울음을 터뜨릴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고아원에서 자랐다. 나는 가끔씩 미혼모였던 내 생모가 내가 너무 못생겨서 나를 포기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내가 보기에도 내 어렸을 적 모습은 여간 못난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알만한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평생 모를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고아원에서는 고슴도치라도 제 새끼라고 함함해 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외모의 미추가 잔인하리만치 성장기에 큰 영향을 준다. 성격에, 능력에, 그리고 미래에. 그 미추의 기준은 어린 아이들이 자주보는 캐릭터의
언젠가 어떤 여자가 배가 부른 체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미혼모 시설을 찾았다. 그 여자가 슬퍼하며 시설로 왔을 지, 아무렇지도 않게 시설에 왔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녀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아비없는 아이를 낳았고,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여자가 낳은 아이가 나였다. 나를 이뻐했던 간호사가 내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이름은 은근히 나쁘지 않았고 아직도 나는 누가 그 좋은 이름을 지어주었냐는 질문을 받는다. 철이 없었던 시절에는 내가 태어났던 병원의 간호사가 작명하였다고 솔직히
첫사랑은 피할 수 없는 천재지변과 닮았다.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를 피할 수 없고 또 어느 순간 느닷없이 정전이 될 때 당황할 수밖에 없듯이, 첫사랑은 내 이성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야생동물처럼 행동했다. 그것은 내가 연애를 금지하는 엄격한 가톨릭계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랐는데도 찾아왔다. 내가 그 사랑 때문에 불의로 생겼을 미혼모의 아이였음에도 아랑곳하지않고 공평하게 나를 찾아왔다. 하지만 내 첫사랑은 모두에게 아무일도 아닌 것처럼, 그리고 내게도 아무일도 아닌 것처럼 넘어가야 했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비참한
미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만큼 서글픈 일이 어디 있겠냐고 묻고 싶다. 평범한 삶의 호흡에서 때때로 거칠게 미움을 토해내다가, 그것이 그리움으로 변하는 순간..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이를 악물고 참아낸다. 그렇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나를 견뎌내는 시간이 때때로 나를 덮치곤 한다. 내가 미워했던 대상은 대개 수녀님들이었다. 내 모든 고통의 원천은 미혼모로서 나를 이 세상에 토해낸 내 생모였는데, 이상하게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기보다 내 일생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수녀님들을 미워했다. 살다보니 모든 것이 미웠다. 오십여명의 아이들
나는 미혼모 시설에서 태어나 19년을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내가 고아원 바깥으로 나와 가장 충격을 받은 사실 중에 하나는, 보통은 자식이 부모님에게 반말을 한다 것이고(같은 연배 어른한테는 극존칭을 하는데 도대체..)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극도로 지탄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나에게 부모님은 수녀님들 밖에 없었다. 그분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미움받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했다. 나는 나를 키워준 수녀님들을 전부 기억한다. 장안나 수녀님, 박아가다 수녀님, 오카타리나 수녀님, 수산나 수
고아원, 다른 말로 아동복지시설에서 살았던 19년의 세월을 한 때는 고단하다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은 말이지, 가끔 그 시간들이 그리워져. 그 때의 꿈을 꾸면 악몽을 꾼 것처럼 깰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마치 라파엘로의 성화를 본 것처럼 마음이 아리어. 우리는 매일 새벽 5시 반에 기상했어. 기상음악도 성가였지. 서둘러 세수를 하고 오면 아침기도야. 나는 아직도 외울 수 있어. 하느님 저를 사랑으로 내시고 저에게 영혼 육신을 주시어 주님만을 섬기고 사람을 도우라 하셨나이다... 그런데 새파란 15살 청소년이 그런 기도가
삼성SDS · 그****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나 고아원에서 자랐고 커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된 지금에야 과거를 고백해본다. 어렸을적 가톨릭계 수녀원에서 자라, 나는 사랑이란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배웠다. 우주와 대자연을 만드시고 우리를 창조한 하느님 아버지가 나를 용납하신 이유는 오로지 사랑이었을 것이리라. 내가 배운 사랑은 주는 사람이 없어도 홀로 감격하는 그런 괴상한 종류였다. 신은 모든 사람을 굽어살필 수가 없어 어머니를 보내셨다는데, 그럼 우리는? 신께서 직접 살피시는 건가요? 이런 순진한 말이다. 나는 그저 내가 홀로 감사하면 어느새
미혼모의 아이로 태어나 19년을 고아원에서 자라면서 어쩔 때는 풍파를, 어쩔 때를 미풍을 겪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오즈의 마법사의 오즈도, 빨간 머리 앤도, 나같은 삶을 살았지 않았을까. 때로는 행복하지 않았을까? 내가 겪었던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그것은 최초로 무지개를 본 인간처럼, 처음으로 은하수를 발견한 사람처럼.. 감탄하고 또 감사하는 순간이었다. 어렸을 적,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 어떤 글짓기 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아서 63빌딩을 간적이 있었다. 그 글짓기 대회는 아동복지시설 아동들 대상으로 열린 대회여서 그런지, 고
나는 태어날 때부터 고아원에 속해, 지금껏 평생을 부모를 모르고 자랐다. 내가 지금까지 엄마를 불렀던 횟수는 내 상사를 부른 횟수보다 적을 것이고 아빠를 찾은 횟수는 한번도 없었으며.. 내가 숨을 쉴 미래의 나날에도 그를 부를 수 있는 날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엄마라는 존재는 대체 무엇이고 아빠는 왜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흔히들 고아원, 보육원 아이들은 부모를 그리워하거나 결핍하며 외로워하는 아이일 것이라 상상하는가보다. 나는 퇴소 후 일반적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과 대화하며, 또는 미디어에서의 보육원이라는 소재를 보면서
나는 SDS에 입사하기 전, 19년을 보육원에서 보냈었다. 누군가에게 듣기로 내 어머니는 시설에서 운영하는 미혼모 시설에 몸을 푼 미혼모였고 나는 첫울음을 터뜨리는 순간부터 보육원에서 숨을 쉬게 되었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 있겠지만.. 보육원에서의 19년은 그렇게 아주 불행하지도 않았고 아주 행복하지도 않은 평범한 나날이었다. 때때로 울고 때때로 웃었다. 자주 외로웠지만 그것때문에 힘든 적은 없었다. 어쨌든 그 세상엔 나와 같은 처지의 아이들과, 똑같이 외로웠던 수녀님들이 함께 했었기 때문이다. 이맘때쯤엔 쑥을 뜯고,
나는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나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성인이 되어 한창 철이 없을 때는 조금만 친해져도 나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솔직히 내 과거는 나에게 있어서 엄청 슬프거나 한게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듣는 상대방은 좋게 듣다가도 말하는 나보다 더 괴로워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었다. 흡사 내가 사이코패스가 되어 여린 소녀를 괴롭히는 그런 느낌이었다. 어느 때부터 나는 내 과거를 감추었고 설사 누가 양친에 대해 물어보더라도 코끼리를 설명하는 옛 중국인들처럼 얼머부렸다. 그런데 나는 얼마 전 술자리에서 나를
나는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나, 수녀원 산하의 병원에서 태를 끊어 울었다. 내 이름은 병원의 간호사가 지어주었다. 내게는 그것이 큰 비극이 아니었다. 자라면서 만날 고통이 더 컸을테니까. 우리 고아원에 언젠가 푸른 눈의 외국인 봉사자가 방문을 하였다. 그것은 우리같은 어린이들에게는 큰일이었고 어른들에게는 늘상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왜냐면 우리 고아원의 정체성은 사실, 외국인으로부터 왔기 때문이었다. 키가 멀거머니 큰 미국인 신부는 한국전쟁 후 한국에 와서 우리 고아원을 설립하였고, 독일의 독지가는 그 사정을 듣고 안타까워 거금
어느날, 별거없는 초등학생 고아 몇 명 앞에 책임감이 투철한 교사가 무릎꿇고 빌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엄청나게 큰 일같이 느껴지겠지만 그 일은 같은 고아였던 내 귀에서만 크게 울렸고 곧 아무 일도 아니게 되었다. 그 선생님은 마산에서 온 마선생님이었다. 당시 마산은 매우 부자가 많은 지역이라 몹시 교육열이 높았는데 어떠한 사명감을 갖고 우리 시설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부임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시설은 원생들을 별도의 교육시설에서 교육을 받게 했다. 즉 전교생이 원생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를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얼마전 블라인드에 글을 쓰고 고아원에서 좋은 직장에 갔다는 그런 댓글을 보았다. 아마 나같은 고아를 처음 보는게 아닐까 싶다. 나는 내가 자랐던 고아원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공부를 잘했던 원생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어떤 아이라도 나와 같은 경험을 겪는다면 나처럼 공부에 매달리는 아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 그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한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에 꾀죄죄하고 마른 몸을 가졌기 때문에 단 세명의 아이와 함께 있더라도 주목받지 못할 그런 아이였다. 그리고 나는 오십명이
나는 태어날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고아원에서 자란 고아이다.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건 내 생모가 고아원 산하의 미혼모 시설에 몸담았던 미혼모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20년동안 고아원에서 살았던 나는 요즈음 MBTI 광풍이 부는 걸 보면 의아하기만 했다. 그게 그럴만큼 센세이셔널한 것인가? 왜냐하면 MBTI가 이렇게 인기를 얻기도 전, 수십년 전에 우리 고아원에서는 이미 매년 MBTI 검사를 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고아원에서는 중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에 어떤 기관에서 전체 기수가 MBTI검사를 받았었다. 그 검사는 강압적인 것
나는 수녀원이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미혼모의 아이로 태어났다. 아주 오래 전에 정신차려보니 내 주변에는 금방 나를 떠나보낼 보모와 나를 울게 만들 형제 자매들이 있었다. 그 어떤 사람이든 내 가족이 아니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고아원 아이가 처음 맞닥뜨리는 차가운 현실은 초등학생 때 일어난다. 처음보는 아이들, 처음보는 콘크리트 시설건물, 처음보는 수녀님들의 시선, 처음 겪는 고아원의 하루 일과. 매일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아침기도를 하고, 일곱시쯤 식빵배식을 받고 매일 먹는 뻑뻑한 빵과 우유를 겨우 삼키고 시작하는 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방금 썼지만 그냥저냥 행복했던 순간은 상당히 많았어요. 단순히 급식 우유.. 두개 받아서 좋았던 때도 있었고 길에서 주운 동전으로 간식사먹고 자판기 율무차 달콤하게 먹었던 순간도 좋았고 바자회에서 군것질하고 또 물건구경하다가 후원자분들이 선물했던 선인장 어항이 너무 좋았고 수녀님들 몰래 만화 봤던 것도 좋았고.. 쓰다보니 행복했던 순간이 많답니다. 글로 다쓰기 힘드네요. 고아원에서도 이렇게 행복했던 순간이 많다는 것.. 솔직히 말을 잘안해요. 그냥 본능적으로 아는 거죠. 눈치가 참 빠르죠? 좋게
오늘도 보육원 퇴소 아동에 대한 어떤 뉴스기사를 보았다. 만 18세가 되어 지원금을 받고 퇴소한 아동이 어떠한 어려움을 겪는지에 대한 기사였다. 나는 어쩌면 가장 생생한 경험을 알려줄 수 있는 샘플이었다. 우리 시설에서 몇되지 않은 대학교 진학생이었기에, 나의 동기들이 이불짐을 짊어지고 떠나고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를, 그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제3자의 입장에서 알려줄 수 있는 희소한 개체였으리라. 우리 고아들은, 사실 고등학생 3학년이 되는 순간 취업전선에 뛰어든다. 대체로 기숙사가 있는 공장으로 가는데, 여자들은 반도체 공장
19년을 고아원에서 살면서 작성한 나의 수기는 어쩌면 내 본위의 이기적인 토로에 불과할 수 있다. 나는 단 한명의 고아로 살면서 나를 지배했던 고아원의 공기를 원망했을 뿐, 나와 함께 살았던 어른들의 고통에는 무지했다.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어렸을 때는 몰랐고 좀더 커서는 그를 변명했으며.. 더 커서도 나는 그저 내 행위를 정당화하기 바빴다. 이제와서 세례명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수녀님은 그렇게 고아들을 위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중학생이 되어 몰래 오가던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주변의 골목집 분식집은 고아들이
여러번 반복해서 쓰는 글이라 부끄럽기도 하지만, 나는 고아원 산하의 미혼모 시설에 온 어머니의 자녀로 태어나 평생을 고아로 살았다. 우리 고아원은 한국에서 내로라할 크기의 시설로, 나는 일반인들보다 훨씬 많은 형제자매들과, 그리고 이모들과, 엄마수녀님들을 만났다. 수녀님들은 내게 모든 것을 가르쳤다. 사랑과 체념과 분노와 고통, 그 모든 것들이었다. 우리 고아원은 꽤 유명해서 여기저기서 후원이 들어왔다. 어렸을 땐 몰랐는데 커서는 그것이 그런것임을 알았다. 나는 그린피스의 북극곰이었고 월드비전의 난민이었다. 내가 초등학생
저는 미혼모의 아이로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고아원에서 지냈어요. 고아들 사이에서 계급을 매기자면 아마 진골일거에요. 태어날 때부터 고아원에 있었는데 그래도 세상 어딘가에 내 엄마가 살아있을 수 있으니까요. 내가 자랐던 고아원에는 이따금 자원봉사자분들이 왔는데요, 하루만 온 봉사자들도 있고 주기적으로 오시는 봉사자들도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다들 고마운 분들인데, 그래도 시간이 지나도 계속 애타게 생각나는 사람은 가끔이라도 계속 오셨던 봉사자들이었어요. Jason이 그런 봉사자 중에 한 사람이었죠. 그리고 특이하게도 그
나는 고아원 산하의 미혼모 시설에서 지낸 엄마의 자녀로 태어났다. 그 사실을 초등학생 때 알았고 그게 벌써 이십년도 지난지 오래다. 때때로 누구를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거 엄마인 것 같았다. 멀리있는 엄마가 부담스러워 할 거 같아 하고 싶은 말은, 나는 정말로 보기만 하고 싶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멀리서 그냥 아무말없이 조용히 볼 수 있을 것 같다. 잘 살고 있으면 그대로 좋고 불행하게 살고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좀 마음이 아플거다. 어쨌든 난 그냥 아무말 없이 보고 싶었
내가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나 19년을 살았던 고아원은, 지역사회에서도, 전국을 통틀어서도 유서깊고 규모있는 고아원이었다. 그렇다는 것인즉, 알게 모르게 많은 후원자들이 있고, 후원물품이 있다는 뜻이다. 모든 후원은 고맙고 은혜로운 것임을 알지만, 가끔씩 그렇게 감사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지금은 유머코드인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나는 20년 전 구역질하면서 먹고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 고아원의 배식 체계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가장 큰 특징은 '주는 대로 먹고, 잔반은 없다'는 것이다. 보통 세종류 기본찬에, 메인 요리나 국이
내가 19년간 자라난 고아원은 전국에서 손꼽을만큼 규모가 있는 시설이었다. 당연히 여러명의 관리자가 있었고, 총원장 수녀님과 총대리 수녀님, 시설장 수녀님과 부원장 수녀님이 계셨다. 그 중에 총대리 수녀님은 총원장 수녀님을 대리하는, 내가 있던 지역의 원장수녀님이었다. 수녀모 슬라이 밑으로 까만 머리와 엄격한 가르마가 있었고, 입매가 모로 닫혀져 그 엄격함이 그대로 보이는 그 분은 공포의 상징이었다. 침방 수녀님들은 내내 아이들과 부대끼며 희노애락을 겪지만 원장수녀님은 차가운 흰색 사각벽의 사무실에서 상주하며 때로 올라오는 초특
전에도 자주 말했던 것처럼, 나는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나 고아원에서 자라 평생을, 지금까지 부모를 모르고 살았다. 누구는 이런 나를 보고 가엾다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자라며 나보다 훨씬 불쌍한 사람들을 보며 자랐다. 너무 위의 사람들은 한계까지 내려보아도 나 정도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불쌍하고 슬픈 이들이 있다. 나는 몸이 약해 어렸을 적 자주 병원에 입원했다. 하루는 너무 아파 구토를 하고 곧바로 누웠던 적이 있었다. 몇시간 뒤에 나는 깨어나 침방 수녀님의 꾸중을 들었다. 바닥에 토하고서는
[Blind] 블라인드에 올라온 글 보셨어요? 고아원의 고아가 나방을 특히 싫어하는 이유 (블라블라) https://kr.teamblind.com/s/kpByrBCY 위가 제가 썼던 글이고 아래가 관련해서 뉴스에 나온거네요. https://www.ilyosisa.co.kr/mobile/article.html?no=232469 무언가 표현할 수 없는 진흙탕같은 감정이 온몸을 훑고가는 것 같습니다. 조금도 시원하지 않고 조금도 슬프지 않은 그저 낡고 얇은 사진에 손가락이 베이는 것과 같은 그런 기분이네요.. #고아원
나는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나 20년 가까이 고아원에서 살았다. 내 기억을 더듬으면 보다 더 어두운 어린 시절이 기억날 뿐이다. 전력이 부족한 전등과 가끔씩 우는 아이들, 그리고 마침내 만나게 된 수녀님. 수녀님은 어렵고 다가가기 힘들었지만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어른이었다. 나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보았던 수녀님을 기억한다. 우리 고아들은 가끔씩 고아원의 철창문을 나가서 바깥활동을 했다. 대체로 어느 후원자나 공공기관이 초청한 공연 관람이었다.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그 날은, 우리와 같은 고아라는 코제트가 나오는 레미제라블 뮤지컬
영화에서의 많은 주인공들은 놀랍게도 고아가 많다. 특히나 히어로들은 툭하면 고아들인데, 현실에서의 고아들의 취급과 비교하면 놀랄 수 밖에 없다. 나는 어려서 영웅을 꿈꾸었다. 그런 꿈을 꾼 고아는 비단 나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아원에서 함께 자란 나의 동기들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며, 나는 어쩌면 영화 속의 고아 히어로들은 절대 존재하지 않으리란 생각을 한다. 의지와 용기가 굳셀수록, 그 고통과 좌절도 크니까. 전에도 몇번 썼지만, 나는 우리 고아원 역사상 가장 공부를 잘했던 고아였다. 이것은 자랑이 아니라, 나
나는 미혼모의 아이로 태어나 19년의 세월을 보육원에서 홀로 부대끼며 살아왔다. 그말인즉슨 내가 기억하는 한 누군가가 나를 온몸으로 안아준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말이다. 나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자라왔다. 나는 가톨릭 성당에서 바티칸의 성종을 울릴 수 있는 성인 성녀가 아니었고 또 득도하여 우주의 원망을 삭일 수 있는 보리수 나무 아래의 싯타르타도 아니었다. 그 고통과 부족을 누군가에게 미루어 원망하지 아니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내 고통이 모두에게 같은 줄 알았다. 모두가 나와 같아서, 오히려 내가 그들의 고
자주 쓰는 글로, 나는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나 아동복지시설에서 자라 현재까지 부모를 모른다. 여기서 혹자는 궁금하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고아원에서 자란 고아가, 어떻게 자신이 미혼모의 자녀임을 알 수 있었을까? 나도 솔직히 초등학생 때 발생한 그 행운이면서 불운한 사건만 없었다면 내가 미혼모의 자녀임을 평생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말 그대로 나는 정말로 태어날 때부터 고아원 산하의 병원에서 태어났고 내 이름은 나를 받은 간호사가 지었다고 한다. 이는 내가 몸이 약해 초등학생 때 병원에 입원했을 때 재회한 간호사가 해준 말
나는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나 19년을 고아원에서 자랐다. 내가 태어나 첫울음을 터뜨리는 그 순간부터 나는 고아원에 속할 운명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떠났고 내 이름은 고아원 산하 병원 소속의 간호사가 지어주었다. 나는 그 사실을 채 열살이 되기 전에 알게 되었다. 지금와서 돌이켜보건데 추석은 어디든지 찾아온다. 그것은 심지어 고아원에도 자비롭게 들러주었다. 나는 고아원에서의 추석들을 거의 다 기억하고 있다. 그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추석이 있다. 젤마나 수녀님과 보냈던 추석이었다. 우리 고아원은 고아들을 매년 담당하는 수녀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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