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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동생이 소개팅했던 이야기

서울9호선운영 · l*********
작성일2018.10.28. 조회수1,664 댓글6

#이야기

친구들과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옆테이블에서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어? 너 웬일이냐?"
 
"어? 형 안녕하세요."
 
친구의 동생이었다. 항상 친구 집에서만 보다가 밖에서 만나니 새삼스럽게 반가운 기분이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친구가 호들갑을 떨며 말을 건냈다. 
 
"이야. 오랜만이네? 잘 지내지 요새? 부모님은 건강하시고?"
 
"형.. 좀 전까지 같이 있었잖아. 뭔소리야.. "
 
친동생도 못알아 보는걸 보니 친구가 술이 많이 취한 모양이었다. 
조금만 더 마시면 부모님도 못알아볼 지경이었다.
우리는 자리를 합쳐 함께 술을 마셨다. 생각해보니 어렸을 적에는 곧잘 같이 어울려 놀았었는데 
나이를 먹고 나서는 함께 어울린 적이 별로 없었다. 오랜만에 옛날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에 
우리는 밤이 깊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친구 동생은 어렸을 적부터 범상치 않은 아이였다. 어릴적 녀석의 꿈은 만화가였다. 
그리고 우리는 녀석이 그리는 만화의 열렬한 팬이었다. 녀석이 그림을 잘 그리는건 아니었다. 
그냥 동그라미에 작대기 몇 개 그어놓고 사람이라고 말하는 수준의 그림실력이었다. 
그냥 졸라맨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녀석의 만화에 열광했던 이유는 
초등학생의 작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파격적인 스토리 때문이었다. 
녀석이 주로 그리던 만화는 배틀물이었는데 그 중에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작품은 
녀석이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이었다. 첫 컷부터 대뜸 주인공과 악당의 대결이 시작되는 만화였다.
 
내 칼을 받아라!
으악! 
죽어버렸다.
 
로 끝나는 만화였는데 죽는게 주인공이었다. 세 컷만에 주인공이 칼을 피하지 못해 죽어버리고 그대로
엔딩을 내버리는 파격적인 구성은 당시 우리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선사했다. 그 작품은 아직도 가끔 
우리들 사이에서 회자될 정도로 충격적인 작품으로 남아있다. 
 
그랬던 녀석도 어느새 나이를 먹어 이제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녀석은 음악에 빠져 있었다. 본인은 취미생활이라고 말했지만 집에 턴테이블까지 있는걸로 
봐선 꽤나 본격적이었다. 나는 오다가다 녀석을 보면서 궁금했던 점을 물어봤다. 
 
"근데 너 그러고 다니면 회사에서 뭐라고 안하냐?"
 
"아 이거요? 뭐.. 별말 안해요."
 
녀석은 평범한 직장인의 모습은 아니었다. 단발머리에서 약간 모자랄 정도의 장발에 
덥수룩하게 기른 턱수엽까지.. 음악인이라면 모를까 평범한 직장인이라고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래? 참 좋은 회사네.. "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통 남자들의 술자리 이야기가 다들 그렇듯 여자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근데 넌 여자친구 없냐?"
 
"저요? 아직.. 아 근데 저 다음 달에 소개팅 해요."
 
"소개팅?"
 
"그러고 나가려고?"
 
"그냥 평소처럼 하고 나갈려고 그러는데?"
 
"..그래도 첫 만남이면 좀 깔끔하게 하고 나가는게 좋지 않을까?"
 
"왜요? 이상해요?"
 
"이상하다기 보다는.. 너무 개성이 강하달까.."
 
우리는 말을 하는 대신 녀석의 고개를 돌려 테이블 한 구석에 머리를 쳐박고 자고 있는 
친구를 보여주었다. 
 
"저거.. 니네 친 형이지?"
 
"네.."
 
"좀 어때보여? 너도 저렇게 늙어가고 싶어? 혼자서 쓸쓸히?"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는지 녀석은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우리는 그 길로 술을 사들고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일단 옷부터 좀 보자. 뭐 입고 가게?"
 
"잠깐만요."
 
달밤에 때 아닌 패션쇼였지만 우리는 한없이 진지했다. 이제는 단순한 소개팅이 아니라 한 가문이 
그 명맥을 이어가느냐 아니면 여기서 대가 끊겨버리느냐의 문제였다. 친구는 이미 가망이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동생뿐이었다. 녀석이 옷을 갈아 입고 오자 우리는 이 가문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 그 티는 뭐냐?"
 
"이거요? 제가 제일 아끼는건데?"
 
녀석이 입고 온 티셔츠는 가슴팍에 다프트펑크의 그림이 그려져있는 알록달록한 티셔츠였다. 
 
"그거 말고.. 다른거.. 다른건 없어?"
 
"잠깐만요."
 
녀석이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오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 티 역시 색깔만 다를 뿐
다프트펑크가 그려져 있었다. 
 
"그냥 평범한 걸로! 와이셔츠 같은거 없어?"
 
녀석의 다른 옷들을 더 보고 나서야 우리는 녀석이 알록달록한 걸 좋아하는 취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고 녀석의 복장은 처음보다 많이 평범해졌다. 
 
"저 정도면 됐을까?"
 
"그래. 좀 더 알록달록한 것만 빼고.. 그냥 단색으로.."
 
"너무 밝지 않아? 좀 더 어둡게."
 
"그래. 좆같은 다펑도 빼고."
 
결국 친구가 자기 옷을 빌려주기로 했다. 다음번에 다시 만나서 옷을 주기로 하고 우리는 돌아갔다. 
주말에 우리는 다시 모여 친구네 집으로 향했다. 웃으며 문을 열어주는 녀석을 보고 우리는 절망에 빠졌다.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한 곳으로 모아졌다. 그건 옷을 빌려주기로 한 그 친구였다. 
 
"..왜??"
 
예전에 그 친구가 소개팅을 하러 간답시고 머리를 변발에 가까운 수준으로 밀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그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는 말 없이 친구를 때리기 시작했다. 
 
"너! 때문! 이야! 이새끼야! 머리! 저! 머리! 어쩔거야!"
 
"아아! 야 그게 왜 나때문이야! 난 그 때 쟤 만난 적도 없는데!"
 
"형이 되가지고 말야. 동생한테! 모범은! 못 보일 망정!"
 
잠깐의 구타가 끝나고 우리는 평정을 되찾기 위해 애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저히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다. 장발이었던 녀석은 언제 한건지 호일파마를 해서 이제는 사자의 갈기와 같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녀석을 앉혀놓고 물었다. 
 
"...발데라마야?"
 
"에?"
 
"머리! 이새끼야! 낼 모레 소개팅 한다는 놈이 머리는 왜!"
 
"왜요? 괜찮지 않아요? 소지섭도 했던 머린데 왜요."
 
"소지섭? 소지섭? 어이구 소지섭이 호일펌이면 님이 어쩌게요."
 
"소지섭은 지랄. 개파이네."
 
"그르게. 대륙제일검이네."
 
이씨 가문의 마지막 남은 실낱같은 불꽃마저 이제 꺼져가려 하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모든 걸 포기한 채 이제는 알아서 하라며 손을 놓아 버렸다. 
그냥 소개팅이 끝나면 술이나 한 잔 사주자며 체념해 버렸다. 
 
하지만 우리가 녀석에서 술을 사주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녀석은 소개팅에서 만난 여성분과 지금도 잘 만나고 있다. 
가끔 친구네 집에 가면 우리를 보는 녀석의 눈빛이 달라져 있다는 걸 느낀다. 
지금까지 보였던 형들에 대한 존중과 존경은 온데간데 없고 
뭐랄까. 굉장히 천한 것. 아랫것. 무능력한 인간들을 보는 듯한 눈으로 우리를 보는 녀석의 눈빛을..
 
하지만 반박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날 슬프게 만든다. 
사바나를 거니는 헤어스타일을 해도, 거지 발싸개 같은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나가도, 
될 놈은 된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만든다.

댓글 6

혜원의료재단 · O*****

장문이긴 했는데, 계속 읽히네요. 재밌게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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