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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원과 크리스마스 미사

삼성SDS · 그*****
작성일2019.12.26. 조회수1,065 댓글9

19년을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지내면서 익숙해질 수 밖에 없는 두개의 성스러운 날이 있었다. 4월의 부활절과.. 12월의 성탄절이었다. 부활절 때보다 성탄절 즈음 유독 서럽고 슬픈 일이 많았던 것은 그것이 겨울에 있던 까닭이 아니었을까 싶다. 춥고 아프고 고달픈.. 지금에야 아름답고 행복한 날이라고 싸매기 바쁘겠지만.. 조금 오래전에 그날은 아기 예수가 태어나 누웠다던 구유처럼 초라하기 그지없는 날이었다.

우리 고아원은 가톨릭계 수녀원이 운영하는 고아원이었으므로 성탄절 미사만큼은 바티칸 못지않게 크고 성대하게 열렸다. 4개의 대림초에 모두 불이 붙으면, 금박이 붙은 화려한 하얀 사제복을 입은 신부가 강론으로 각종 기쁜 말을 내뱉고, 도화지로 만들어진 호랑가시잎으로 장식된 크리스마스 트리는 화려하게 불을 뿜었다.

내가 만일 그 때 좀더 덜 세속적이었다면 좀더 행복하고 아름다운 성탄절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수능 공부로 조금 피곤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전야 미사를 참석하고, 고3 공부를 걱정하며 EBS 교재를 들추다가 다음날 새벽 성탄제 미사를 참여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급기야 시편의 추상적인 찬미가 오가는 제2독서를 듣다가 졸음으로 우당탕 머리를 박았다.

강당 기둥 옆에서 공순히 손을 모으던 침방수녀님이 고리눈을 뜨고 노려보았다. 그것을 보니 더 이상 졸면 모세가 삼지창을 들고 쫓아오리라고 마음먹고 잠을 쫓았지만 몸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본디 무릎꿇고 경건히 맞이하는 성찬의 전례 모두를 내도록 숫제 거렁뱅이가 구걸하는 자세로 졸았다. 수녀님의 표정이 좋지 않았음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떠했냐면... 별로 좋지 않았다. 솔직히 유쾌하지 않은 추억을 길게 늘여 쓰고 싶지 않았다. 수녀님의 잔소리와, 망한 성탄절 식사와.. 울적한 마음으로 교재를 들추다가 모의고사 일정을 보고 더 우울해진 기억은 다시 생각해도 평생 명랑해질 길 없는 편린이었다.

그랬었는데..

가끔씩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기가 막힌다. 어떻게 그 때를 그리워할 수가 있을까? 다시 돌이켜봐도, 강제로 참석했던 미사와 수험생의 스트레스가 얽힌 그 때는 결코 조금의 달콤함도 느껴지지 않는, 비리고 짠 눈물과도 같은 나날이었다.

그런데도 스스로를 괴롭히듯 얼간이같은 나의 뇌가, 심장이 때때로 그날로 나를 이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니 그 때의 크리스마스가, 미사가, 수녀님이.. 어쩔 때는 보고싶은 그리운 색채가 되어 나를 덮치는 것이었다.

#고아원

댓글 9

COUPANG · i*********

횽냐... 고생했어... 좋은 회사도 입사하고 잘커줘서 고마워

서울특별시 · l*********

오늘도 잘읽엇어요
그때의 나 또한 나 그 자체로 인정하고
스스로를 사랑하게 된 결과 아닐까요

근데 태그 빼먹으셧어요

스타벅스 · 빨*******

오랜만입니다! 항상 글 잘 보고있어요😊 추운 겨울 따듯하게 잘 보내시고 별 탈 없이 2019년 잘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

KT · l*********

장면하나하나가 선명하게 그려지는 글이네요

한국무역보험공사 · y******

애증인가봐요
추억은 기억을 가끔은 그리웁게도 하더라구요

코반스코리아 · 구***

횽아 오랜만이다! 크리스마스 지나버렸지만,, 메리크리스마스였어🎄

공무원 · 김**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와 맞닿는 글이네요.

현대두산인프라코어 · 보*********

인간은 비슷한 뇌구조 아닐까 합니다

아무리 선해하고 분칠하여도 남아있는 흔적은 날카롭지만 가장 선명한 기억으로 자리 잡는것을 보면

아니면 방어기재의 다른 표현일지도

아니면 그리운것이 진실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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