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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원의 고아가 나방을 특히 싫어하는 이유

삼성SDS · 그********
작성일2021.07.18. 조회수2,095 댓글31

나는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나서 19년동안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성장하면서 겪었던 시간 중에, 아프고 쓰릴 때도 있었지만 은근하게 그리운 시절도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 시간들을 떠올리면서 울고 웃고 한다.

우리 시설에는 내가 짐작치 못할 유구한 전통이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여름날이 되면 고아원 원생 중 일부를 뽑아 양산의 대단위 밭으로 작업을 보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중학생 고학년 이상의 시설 원아에게 고추밭과 같은 밭일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다. 실제로 내게도 그랬다. 왠만한 밭일은 힘들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려웠던 일은.. 야산 중턱의 갈잎밭을 갈아엎어 밭으로 만드는 개간작업이었다.

그러한 작업은 아무렇지도 않게 시작된다. 여름방학이 오면, 갑자기 무슨 체험학습을 해야한다고 어른들이 말하며 거대한 컨테이너조립형 수련원으로 우리를 실어날랐다. 그 곳엔 수녀님들도 있었고, 우리 고아원 산하의 중고등학교 선생님들도 있었다. 어떤분이 있었는지는 지금은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때 기억이 나는 건 죽도록 힘들었던 개간의 어려움과, 야밤에 얼차려를 받으며 느꼈던 나방의 불쾌함이었다.

개간의 어려움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많은 이들이 알리라고 생각한다. 팔이 베이면서 낫으로 풀을 베고, 농장기로 산흙을 파헤치면서 돌을 빼내는 작업이다. 너무 힘들다보니 벌레는 아무렇지도 않고, 날아다니는 벌레도 눈속으로 직진하지만 않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런 벌레 따윈 아무렇지도 않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야밤의 얼차려를 받으며 느낀 나방의 불쾌함은 이상하게도 평생을 갔다. 밭일을 하며 힘들어 지쳐서 자고 싶은데, 갑자기 누가 떠든다며 정신수련이 필요하다고 밤 10시 넘어서 마당에 집합을 시키고는, 팔벌려 뛰기, 엎드려 뻗쳐를 시키는데.. 하필이면 그 장소가 시골의 유일한 백열등이 빛나는 곳이었으며 잠깐 불을 밝히는 동안 온갖 종류의 날벌레 - 수박껍질같은 두꺼운 날개를 가진 나방 포함 - 들이 모여든다는 것이 우리 고아원 원생들의 비극이었다.

팔벌려 뛰기를 할 때 내 운동화 밑창으로 나방이 으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엎드려 뻗쳐를 할때 손바닥으로 가려운 날개짓 소리가 느껴지면서 으깨진 나방의 잔해가 전해졌다. 아직도 잊을 수없는 트라우마였다.

나는 아직도 나방을 너무나도 싫어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조그만한 나방이 날아들어도 질겁하는 사람인것처럼 웃는데, 나는 그런 종류의 나방은 조금도 무섭지 않았지만 설명할 길 없는 슬픔으로 같이 웃음에 동조했다.

그저 으깨진 나방의 잔해가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아 끔찍했을 뿐이다. 그 소리를 아직도 표현할 길이 없다. 힘들었던 개간노동은 창명한 시골의 밤하늘로 씻겨나갈 수 있었지만, 시궁창같았던 얼차려는 무엇으로도 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직도 나방을 싫어한다. 그 날개소리를 들으면 자동적으로 내 손바닥으로 으깨던 나방의 잔해가 생각나는 것만 같았다. 그 때의 기억이 나고, 그 때의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고아원

댓글 31

새회사 · h*********

글도 잘쓰고…. 훌륭하다 🥺

하나금융투자 · 연*********

놀랍다. 고아원에서 자라면서 이렇게 완벽한 문법과 표현력을 익힐 수 있었다는게...

경기도교육청 · 누******

정규교육은 받겠지;;;; 낮잡아 보는듯

작성일2021.07.18.

현대모비스 · 멋*********

하나형 선입견이야..ㅜ ㅜ
고아원다녔다고 글을 감정담아 못쓰거나 그러진 않아..

작성일2021.07.18.

하나금융투자 · 연*********

고아원에서 자라도 정규교육 받는 다는 것은 잘 알고 있고. 글쓴이는 일반적인 정규교육 이수자들 보다 한 차원 높은 수준의 문장력을 가지고 있어서 놀랍다는 거야.

작성일2021.07.18.

현대모비스 · 멋*********

제일 예쁘고 행복했어야 할 나이에..
트라우마 남아서 너무 슬프다 형.
그래도 힘든시기 잘 버텨주고 커줘서 고맙네..ㅠ ㅜ

금융결제원 · l********

쓴이의 입장에서 지금 보육원의아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게 뭘까요 ?
의식주는 기본적인부분은 해결되는것 같지만
교육은 아직도 부족한가요 ?
수녀입장이아니라 원생입장에서 필요한게 뭐가있을까요

삼성SDS · 그******** 작성자

제가 30년 넘게 고뇌했던 질문이에요.미성년 아이에게 필요한건 애착할 수 있는 대상입니다. 애착하려면 그 대상이 아이를 편애해야해요. 그런데 보통의 보육원( 구 고아원)은 양육자의 편애를 원칙적으로 금지합니다. 당연한 이유인데, 편애받는 아동은 구원받지만 그 외의 아동들은 박탈당하니까요. 무엇이냐 묻는냐면.. 애착할 수 있는 대상을 찾을 권리라고 정리하겠습니다..

보통의 가정은 이 딜레마가 너무 쉽게 풀리더라고요. 부모가 자신의 아이들을 다른 아이들보다 편애하는건 너무도 당연한, 공리와 같은 사실이더라고요.. 저는 퇴소하고나서 이를 보고 깜짝놀랐습니다. 조금 슬프기도 하고요.

여튼 보육원 아이에게 필요한건 편애입니다. 너는 특별하다, 나의 특별한 아이를 이렇게 대하는건 학대다 하고 울어줄 수 있는 그런 존재.. .

그러나 제가 삶에 흐느끼며 알게된 그런 존재는 친부모 밖에 없더라고요. 보육원 아이에게.. 가능할까요. 오히려 제가 묻고 싶습니다.

작성일2021.07.18.

금융결제원 · l********

감히 제가 생각할 수 없는 답이네요, 보육원의 졸업동시에 나가야하는 상황과 교육의부족함을 생각하면 그부분은 더 나아질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어려운 문제네요… 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아무튼 글 잘 보고있습니다..

작성일2021.07.18.

새회사 · 멍****

가끔 봉사활동 간적 있는데 아이들 이뻐도 안아주지 말라고 하더라구요..저는 잘 몰라서 그 당시에도 상황 살명 해주셨지만 의아해했는데 글쓰신 내용 보니 뭔가 어렴풋이 오네요..그럼에도 잘 이겨내신거 너무 장해요.뭐라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본인 많이 대견해해주세요 장해요!!

작성일2021.07.18.

대한민국공군 · 파****

글 정말 잘쓴다 힘든 기억이 잘 느껴져

에어부산 · l********

형님 돌아오셨네요. 응원합니다

새회사 · ¡****

아동 착취 아니야? 속상하네...ㅜㅜ 그럼에도 멋진 사람으로 자라줘서 고마워 형. 글에서 형의 수많은 고민과 아픔이랑 동시에 단단해진 인품까지도 느껴지는 것 같아....
위에 금융결제원형의 질답 보고 왔는데, 애정을 쏟아줄 주양육자가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다양한 특기 교육 같은거로 아이들 각각의 특별함, 자존감을 성장시켜줄? 그런건 도움이 될까?

SK · 너*********

그러고보니 이 형 닉이 시의 한 구절이네
나도 좋아하던 시인데, 류시화시인 시집에 있던거같다

새회사 · V*****

뭐지, 나 지금 소설읽은거 같다. 뭉클한데, 촉촉하기도 한....
이해를 하고 싶어졌다 이사람을,

하나금융투자 · 인*********

오늘 경남 합천 천주교 보육원 언론에 나왔어. 아마 이 곳이 그 곳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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