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픽 블라블라

대학시절 개같은남자와 고양이같은여자 EP.5

#이야기
#개와고양이

그날은 그랬다......
며칠 전 부터 하늘이 심상치가 않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흩날리듯이 내리던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고,
오래된 석회석 돌담 사이로 고인 빗줄기가 흘렀다. 티셔츠는 어느새 흠뻑 젖었지만 환은 그런것 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내린 비 때문에 다들 우왕좌왕 이었다.

환은 정신 없이 운동장과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천막을 확인하고, 구멍나서 비가 새는 곳을 메우고, 혹시나 젖으면 안되는 물건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던 와중에 환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 였다.

'이 인간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건가.'

회장이라는 인간은 이 상황에 어디에 있는 건지 도무지 보이지가 않았다.

"야 희건이형 못봤어?"

"못봤는데요."

"아.. 씨 어디간거야.

야 누구 학회장 본 사람 없어?"

환은 돌아다니는 후배들을 붙잡고 물어봤지만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희건이 형 아까 저쪽 천막에서 본 거 같은데..
술 마시고 있는 것 같던데요?"

"술? 어디서?"

"저 쪽 다른과 천막에서 본 것 같아요."

망할놈의 인간..
환은 후배가 말한 천막으로 가봤다.
희건은 태평하게 앉아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희건은 환을 보더니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어! 왔어! 야 앉아 앉아. 날씨 죽이네.
이런 날은 역시 막걸리지."

"형 뭐해요 여기서!
지금 저기 난리 난 거 안보여요?"

"아으.. 시어머니. 진짜.
홀딱 다 젖은 거 보니까 대충 수습 됐구만 뭘."

원래 이런 인간 이었지.
환은 희건을 두고 돌아섰다.

"야 진짜 안먹을거야? 한 잔 하고가~"

"됐어요. 둘 다 여기 앉아 있으면 애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성실한 척 하긴. 알았어.
난 한 잔 만 더 마시고 갈게."

"설마요. 한 병 이겠죠."

"새끼.. 날 너무 잘 안단말야. 암튼 먼저 가 있어~"

환은 다시 천막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천막 안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환은 혹시 빠트린게 있는지 주변을 둘러봤다.
대충 정리는 다 끝난 것 같았다.
환은 시계를 봤다.
이제 곧 있으면 탁구 예선이 시작할 시간이었다.

"야 안나 어디갔어?"

"요안나요? 아까 학회실쪽으로 가던데."

환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 끝에서 누군가 자기 상체만한 박스를 들고 낑낑대며 걸어오는 게 보였다.
환은 다가가서 박스를 옮기는 걸 거들었다.

"고맙습니다. 어 오빠?"

요안나였다.

"너 여기서 뭐해? 빨리 준비 해 우리 가야 돼."

"벌써 그렇게 됐어요?
이거 비 맞으면 안된다 그래서 치우고 있었죠."

요안나도 물건 나르는 걸 거든 건지 흠뻑 젖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환은 고개를 숙였다.

"흠... 흠.. 야. 일단 옷부터 좀 갈아입어라."

젖은 티셔츠 너머로 속옷이 그대로 비쳐 보였다.
요안나는 그제서야 눈치를 챈건지 손을 들어 상체를 가렸다.
갑자기 손을 놓은 탓에 박스가 환의 발등으로 떨어졌다.

"아!"

요안나는 안절부절 못하며 물었다.

"어떡해. 오빠 괜찮아요?"

"야 갑자기 놔버리면 어떡해. 씁.. 괜찮아."

"미안해요. 놀라서..

환은 발등을 문질렀다.
부러지거나 붓지는 않은 것 같았다.

"괜찮아. 신경쓰지마.
그건 그렇고 너 그러고 계속 돌아다닌 거야?"

그제서야 알아차린 건지 요안나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하도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보니까..."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차가운 인상과는 달리 요안나는 허당끼가 있었다.
요안나를 보면 볼 수록 처음 봤을 때와는 다른 모습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머리도 엉망이고, 옷도 전부 젖은걸로 봐선 아마 앞장서서 뛰어다녔을 것이다.
힘든 일, 고된 일은 하기 싫어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환은 여전히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요안나에게 말했다.

"너 갈아입을 옷은 챙겨 왔어?"

"아뇨.."

"학회실 가봐. 내 가방에 셔츠 남는거 있을거야.
일단 그거라도 입고 와."

요안나가 옷을 갈아 입으러 학회실로 들어가고 환은 앉아서 발을 계속 주물렀다.
갑자기 아까 본 요안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담하다는 말도 과할 정도로 마른 몸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의외의 볼륨까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갑자기 환은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요안나는 옷을 갈아 입고 나와 있었다.
요안나는 환의 생각보다 더 작았다.
티셔츠 밑단은 거의 허벅지를 덮다시피 내려와 있었고, 목부분 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한쪽 어깨가 보일 정도였다.
자칫 우스꽝 스러운 모습일 수도 있었지만 환은 자기도 모르게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오빠. 뭐해요? 늦었다면서요. 빨리 가요."

"어? 어. 응. 가자."

요안나와 환은 함께 체육관으로 향했다.
다른 과들의 시합은 이미 시작되었는지 여기저기서 응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이 모여 있었다.
과의 거의 모든 사람이 다 와있는 것 같았다.
이 모든 일을 벌인 원흉을 환은 금방 찾아 낼 수 있었다.

평생에 도움이 안되는 인간 같으니... 이미 얼큰하게 취했는지 벌개진 얼굴을 하고 있는 희건이 보였다.

"야! 왜 이렇게 늦었어! 내가 애들 다 모아왔어!"

다들 기대에 찬 눈으로 환을 보고 있었다.
환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갑자기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아닌 체육대회일 뿐인데.
이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시합을 해 봤었다.
하지만 그 때도 이만큼은 긴장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오빠 괜찮아요?”

요안나가 물었다.

"어? 어 그럼.. 넌?"

"긴장돼 죽겠어요."

요안나는 바싹 긴장한 모습이었다.

의외로 담이 작구나. 하고 환은 생각했다.

"괜찮아. 그냥 체육대횐데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환의 입도 바짝바짝 마르고 있었다.
어쩌면 요안나와는 다른 감정이었다.
시합이 시작됐다.

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상대가 아무리 잘 쳐봤자 일반인중에 잘 치는 정도일 뿐이었다.
아무리 몇 년동안 운동을 하지 않았지만 질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공이 날아왔다.
생각하는 사이 이미 시합은 시작됐다.
환은 무의식 적으로 공을 받아쳤다.
공은 그대로 테이블 밖으로 날아갔다.
환호 소리가 들렸다.

환은 고개를 숙였다.
왠지 다들 자신을 보고 있을 것 같았다.
실망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그럴 줄 알았다며 비웃는 이도 있을 것이다.
환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오빠 괜찮아요."

요안나가 환의 등을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환은 다시 라켓을 고쳐 쥐었다.
이번에는 날아오는 상대의 서브를 정확하게 받아쳐 득점에 성공했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환은 조금씩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연이어 득점에 성공 했을 때, 체육관 안은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이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었다.
자신감.
절대 질 것 같지 않다는 자신감과 지고 싶지 않다는 승부욕이 솟구쳤다.
환은 조금씩 과열되기 시작했다.

"아오!"

쉬운 공이었다.
그냥 넘기기만 하면 다음은 자신이 알아서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요안나가 넘긴 공은 그대로 테이블을 벗어났다.

환은 요안나를 쳐다봤다.
요안나는 약간 놀란 것 같았다.
환은 흥분을 가라 앉히고 말했다.

"안나야. 그냥 넘기기만 해. 세게 칠 필요 없어."

"알았어요. 오빠. 미안해요.."

"아냐 괜찮아."

요안나는 풀이 죽은 얼굴로 말했다.
그 탓인지 요안나는 다시 쉬운 공을 놓치고 말았다.

"야! 그냥 넘기기만 하라니까!"

요안나는 대답이 없었다.
어느새 얼굴에는 미소가 가시고 굳은 얼굴 뿐이었다.
아차 싶었다.
돌담 사이에 고인 빗줄기처럼 안나의 눈가에도 비가 고여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환호하고 있었지만
환과 요안나, 둘 사이의 공간에는 정적 뿐이었다. 희건이 심판에게 가서 얘기를 하는게 환의 눈에 들어왔다.

첫세트를 이기고 나서 희건은 요안나에게 가서 얘기를 하는 가 싶더니 다시 심판에게 다가갔다.
요안나는 그대로 다른 친구들과 함께 체육관을 빠져나갔다.
2세트가 시작하기 전 사람이 바뀌자 상대편에서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애가 아픈걸 어떡해! 이 사람들 이거 냉정하네.
그렇게 이기고 싶어??"
희건은 넉살좋게 사람들의 항의를 받아 넘겼다.
결국 환은 다른 여자후배와 함께 2세트를 시작했다.
시합은 환의 승리였다.
하지만 환의 마음에 남은 건 불편한 마음 뿐이었다.
체육대회 첫 날이 그렇게 끝나고 다들 잔디밭에 모여서 뒷풀이를 했다.
아직도 먹구름은 끼어 있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환은 달빛 아래에 숨어서 요안나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이제는 괜찮아진 건지 요안나는 웃으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밤바람에 숨겨 한숨을 내쉬던 환에게 희건이 다가왔다.

"야~ 장난 아니던데? 완전 날라다니더만?"

"......."

희건은 말 없이 빈 술잔에 술을 채웠다.

"재밌냐?"

"...뭐가요?"

"체육대회 재밌냐고?"

희건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환은 묵묵부답 이었다. 대답 대신 환은 술잔을 들었다.
둘은 잔을 부딪히고는 술잔을 들이켰다.
유달리 쓴 맛이었다.

"우리 쫌 긴장좀 풀고 살자. 어? 특히 너."

희건은 환의 어깨를 한 번 툭 치고는 일어나서 자리를 옮겼다.
비는 그치고, 밤바람은 선선했다.
그리고 환은 이겼다.
하지만 그 승리는 아까 마신 소주처럼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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