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픽 자녀교육·입시

20년전 정시로 의대 입시 성공기

의사 · 졸*****
작성일02.23 조회수1,737 댓글38

강남에서 자란 나와 딸 이라는 글 보고 나도 몇자 적어본다.

난 지방 소도시에서 초, 중, 고를 나왔다.

지방이었지만 당시 주변에 신설된 대학교들이 많아서 서울에서 나고 자란 젊은 부부들이 교수나 대학병원 의사로 많이 임용되어 다들 교육에는 열성적인 분위기였다.

사촌 애들이나 요즘 애들 선행 많이 한다고 하는데
그럼 그때는 선행을 안 했냐 하면
전혀 아니다.

초등학교 들어가서 2학년 때 원어민 영어 회화 과외를 시작했다.
오래 하지는 않았다. 2, 3학년에 했던 것 같고.

3학년까지는 입시를 위한 학원을 따로 다닌 기억은 없다.
미술, 악기, 영어 회화 정도가 다였던 듯.

하지만 4학년이 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3학년 말 학교에서 경시반을 뽑았다.
요새도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때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시, 도, 전국으로 경시대회라는 게 있었다.

과목은 두과목.
수학과 국어.

정규 수업이 끝나면 경시부 활동을 했는데
놀기도 놀았지만 공부량이 적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8-9시에 집에 가기도 했던 것 같고, 숙제도 항상 있었다.

경쟁심이 별로 없던 나는 밤늦게까지 해야 했던 공부양이 많다고 느끼기는 했는데
다행인지 난 그닥 노는거에 큰 관심 없는 편이었고, 주어진 건 그래도 잘 버티는 편이라서.
뭐라고 해야하나. 게임이나 그런 걸로 얘기하면 공격력이 좋은 건 아닌데 맷집이 좋다고 해야하나.

그래서 그럭저럭 할 수는 있었다.
엄마는 내 교육에 관심이 높은 편이셔서 내 경시대회 성적에 좀더 스트레스를 받으셨지만
난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경쟁심이 별로 없는 편이라 스트레스 받지는 않았다.

경시대회 선행은 어느 정도였냐하면
4학년에 연립방정식을 배웠는데 이해가 안되어서 집에서 따로 배웠다.
따로 배워도 이해가 썩 잘 되지는 않아서 이게 정규교육 과정에 언제 나오나 두고 봐야지 했는데
그렇게 기다리던 연립방정식은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교과서에 나왔다.

그래서 난 요새는 옛날이랑 달라요 애들 선행 훨씬 빨리 해요 라고 누가 해도
옛날에도 선행은 다 했는데 가 사실 내 속마음이다.
그냥 말하면 귀찮으니까 말을 안 할 뿐.

어쨌든 경시부 3년을 입시라고 생각하고 했던 건 아니었지만
그 3년을 잘 버티고 나자 이후 내 입시가 훨씬 편해진 건 사실이다.

그 후 중학교에 입학했고 그때부터는 방과후에 학원이란 곳을 다녔다.
입시학원이라서 국영수 수업을 했고, 마치고 집에 오면 9시 정도 되었던 것 같다.

과외는 성문영어를 했다.
성문 기본으로 시작해서 성문 종합영어까지 중학교때 끝내는 과외였다.
한 1년 했나. 2년 했나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수학은 공통은 중학생때 뗐던 것 같다.

나 때는 전교석차, 반석차를 다 알려주는 시대였어서
심지어 생각해보면 초등학교때도 매달 시험을 보고 올백이니 아니니 했었으니까.
내가 어느정도 하는지는 알기가 늘 쉬웠던 것 같다.

지금 교육과정에서는 자기가 어느정도 위치인지를 알기가 너무 어려운 것 같다.
그게 더 나은 교육방법인가?

직장인은 직장에서 인사고과를 받고, 자영업이나 사업하는 사람은 매출로 고과를 갈음한다.
학생이 학업성취도를 평가받는 일이 그렇게 비인권적이거나 비윤리적인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문제는 주제는 아니니까 차치하고 다시 돌아가자면

중학교는 그렇게 입시학원 하나, 수학과 영어 과외를 했고

고등학교 가서는 기존에 다니던 학원을 끊었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야자가 10시인지 10시반에 끝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 공부할 시간이 많았다.
정규수업이 5-6시에 끝났나. 그러고 나면 저녁을 먹고 야자를 했다.
이때 내신공부도 하고, 문제집도 풀고, 예전에 과외했던 성문영어나 정석도 풀었다.

야자가 끝나면 집에 갔고
집에서도 공부를 안하지는 않았다.
씻고 좀 쉬다가 어쨌든 책상에 앉아는 있었다.

난 야행성이라 빠르면 1시 늦으면 3-4시에 잤던 것 같고
그렇다고 3-4시까지 열공한 건 아니었다. 라디오 듣는 맛에 깨어있던 것 같다.

고1-2 때 수1, 수2 과외를 했었고, 중학교까지는 4명 정도가 하는 과외를 했다면
고등학생때는 비슷한 성적의 친한 친구 1명과 주로 2명이 하는 과외를 했다.

그렇다고 엄청 고가 과외는 아니었다. 그냥 대학생 과외였고,
오히려 사교육비는 중학생때보다 덜 들지 않았나 싶다.

과외를 하든, 학원을 다니든 항상 국영수 위주였는데
고2 겨울방학때 처음 사과탐 방학 특강을 들었다.

듣고나니 모의고사 점수가 확 오르더라.
사과탐은 메이크업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올라가서는 영어 과외는 더 하지 않았다.
국어도 학원이나 과외를 따로 하지 않았고, 유일하게 돈 쓴게

고3때 무려 강남 대치동에 원정가서 이계덕 언어 수업을 한번 들었다.
신세계였다. 귀에 쏙쏙 들어왔고.
이런 수업을 듣는 애들이 있었구나 복 받았네 싶었다.

하고 나서 딱히 언어점수가 더 오르지는 않았다.
난 이과긴 했지만 항상 수학이 문제였고, 언어는 이미 1-2개 틀리는 정도였다.

언어에 따로 돈을 투자하지 않았는데 성과가 좋은건
어릴때부터 책을 좋아한 것 말고는 다른 이유는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대학가서 본 동기들 다수
지금은 책을 안 읽어도 어릴때 책 안 읽은 애들은 별로 없었다.

어릴때 책 읽는 습관이나 책을 좋아하게 하는 게 사교육비 지출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문만 빨리 읽어도 해결되는 과목이 언어, 영어, 사탐이다.

나라는 인간이 성장하는데도 책이 큰 도움이 되었지만 입시에도 도움이 컸다고 본다.

고등학교때 또 했던건
언젠가 손주은 사탐 수업을 한번 들었던 것 같은데

수업 내용은 기억이 안나고, 한 20년간 식구들과 저녁을 먹어본 적이 없다고 한게 기억이 난다.
사모님이 싸주신 저녁도시락을 항상 차에서 드셨다고.

당시에는
아. 대단하다. 어느 영역에서도 대성하려면 저런 노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구나 생각했다.

지금 드는 생각은
나중에 메가스터디 주식이나 좀 사놓을껄. 이렇게 인강 위주의 교육환경이 될 줄 몰랐다.

고등학교를 그렇게 보내고 수능을 치렀다.
내가 대학 가던 해는 불수능이라서 나도 뭐 모의고사 대비 대단히 잘 보지는 못했지만
다들 원래 점수보다 떨어져서 결과적으로는 엄청 못 본 것도 아니어서 그냥 갔다.

다만 그 해부터 의대 열풍이 심해서
그 전해는 전국 의대가 4% 컷이었다면 나때는 더 올라간 것.

과동기중 타 대학 대기 10번 안쪽이 애들도 있었다.
그전에는 두자릿수로 대기가 다 빠졌었는데.

제주대 의대까지 채우고 서울대 공대 간다는 말이 생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서울대 공대를 갔어야지 싶다.

암튼 수능을 치르고, 훨씬 여유로워졌지만 논술과외를 하나 시작했다.
어떠한 현상이나 상황 같은 걸 주고 내 생각을 쓰게 하는 과외였고,
원래도 읽고 쓰는건 좋아해서 과외여도 재미있었다.

내 주특기 과목들은 사실 문과였던 것 같다.
그런데 성향은 이과적이기는 하다. 좀 단순하고 일관된걸 좋아해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데 있어 처음에는 적응이 좀 어려웠다.

사람은 매번 다르고 사람 자체가 너무 큰 변수라서.
그래서 다른 종류의 업무가 나한테 더 맞지 않았을까 싶다.

강남에서 자라신 분은 실력 정석이 새카매지도록 푸셨다 했는데
난 수학이 가장 자신 없었던 사람이라 수학이 좀 쉽게 나오면 점수가 좋고 수학이 좀 어려우면 점수가 나쁜 경우가 많아서 수능 수학이 좀 쉽게 출제되었으면 했지만 뭐 삶이 기대를 항상 충족시켜주지는 않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입시에 유리했던 내 개인 특성으로는

1. 좀 무딘것 (예민하지 않아 스트레스 게이지가 높은 편)

2. 딱히 다른 잡기에 관심도 없고 그런데에 능하지도 않은 점 (유일한 잡기는 게임이기는 했으나 빠져서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3. 경쟁심이 없는 점, 이건 무딘것과도 일맥상통하긴 한다. 단거리 경주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대입이라는 마라톤에는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근데 또 주변을 보면 경쟁심이 있는 애들이 대학까지는 잘 가는 것도 같다. 이렇게 적고 보니 입시에 장점은 아닐 수도.

그리고 입시에 유리했던 내 조건이

1. 책을 유난히 좋아한 점, 초등학교때 숨어서 책을 읽었다. 눈 나빠진다고 혼나서.

2. 하고 싶은 건 항상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쯤엔 과학자, 의사, 다큐멘터리 PD 등이 왔다 갔다 했다. 중학교때는 돌리가 유행이라 생명과학자가 되겠다고 했었다.

시켜서 하는건 초등학교때는 먹힌다.

또 애들 중에 칭찬 해주고 하면 칭찬들으려고 어른이 시킨거 잘 하는 애들도 있으니까. 하지만 중고등학교때는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고등학교 가서 혼자 공부하는 시간이 주였는데 누가 시켜서만 했다면
그렇게 긴시간 앉아있지는 못했을거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장래에 뭐가 되겠다는 생각이 공부하는 데 있어 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

강남에서 자라신 분이 글을 워낙 잘 쓰셔서 읽다보니
나도 내 경험을 적으면 다른 분들에게 도움이 되려나 해서 몇자 적어보니 짧지는 않다.
입시에 대한 얘기만 원하시는 분들은 여기까지 보시면 되겠다.

사족;

제목은 의대 입시 성공기이지만
인생이 성공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건 죽는날까지 모르겠지.

의대를 진학하고 경험한 경시부보다 더 심한, 살면서 다시는 그렇게 공부할 일 없을 만큼 절대적으로 많았던 공부양. 뭐 그 사이에도 연애도 하고 했지만서도.

국시 치르고 나서 시작한 병원에서 최하층이라는 인턴생활, 단순히 업무양이 많은게 문제가 아니다. 인격적인 모욕도 있고. 오히려 업무만 보면 어느과든 레지던트 1-2년차가 일은 더 많다.

1년이니까 참고 했지. 2년이었으면 수능 다시 쳐서 다른 과 갔을거다. 의사 안 하고 말지.

그 이후 이어졌던 레지던트 4년을 끝내고 나니

난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 고등학교때도 느긋했던 내가 지금은 엄청 급한 성격이다.

물론 바뀌면서 사회에 적응은 더 잘 하는 사람으로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요새 정원 늘린다고 많은 학부모님들이 자식 의대 보내려 한다는데
난 내 자식은 의대 보낼 생각이 없다.

작금의 상황이 아니어도 보내지 않을거다.
장래가 밝지도 않고 베이비 붐 세대 지나면 내수시장 수요 자체가 줄어드는 산업이다.

어느 분이 지금 의대생들 인서울 의대 가려고 수능 다시 친다는데
정말이라면 다시 생각하라고 조언해주고 싶다.

하루라도 빨리 졸업하고 제2의 길을 모색하든지, 아니면 아예 다른 길을 생각하든지.

암튼 처음 생각보다 글이 엄청 길어졌네.
아마 이 게시판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쓰는 글이 아닐까 싶다.

다른 분야도 힘드니까 다들 의사할껄 하실텐데 의사도 내 상황이 그닥이라.
저성장기에 중장년기를 보내는 우리 세대가 문제인가.

모두들 새해 좋은 일만 있으시고 건승하시길.

댓글 38

새회사 · 마****

남자가쓴글인줄 알았는데 누님이라고해서 놀람..

현대자동차 · j*********

지방대의대나왔나보네 04학번..ㅋㅋ

의사 · 졸***** 작성자

ㅋㅋㅋ 매우 근접하심

치과의사 · l*********

참 글을 잘 쓰시네요

잘 봤습니다

의사 · 졸***** 작성자

감사합니다 선생님 피차 사람보는 직군인데 선생님도 홧팅입니다

LG화학 · ×***

형 글 잘쓴다 ㅋㅋ 읽으면서 중년 아저씨가 담배 한대피우면서 쓴거같은 느낌났는데 여자여서 더 신기하네. 재밌게 잘 읽었어

의사 · 졸***** 작성자

ㅋㅋㅋ 신기하네요 제 문체가 남자 같나봐요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무원 · i*********

근데 왜 의사부부 하지 않았어..? 그냥 지금 남편을 너무 사랑해서인가?.. 여자상향혼이 진짜 맞다고 생각하는데 전문직은 그런 생각을 더 했을 것 같기도 해서..

의사 · 졸***** 작성자

소득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지만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것들, 예를 들면 사회적 시선이나 상대방의 부담은 미처 생각 못 했어 그래도 열심히 노력해야지

경찰청 · l********

글 너무 잘봤습니다 저도 중년 대머리 아저씨 상상하면서 읽었는데 반전이..ㅋㅋㅋ

의사 · 졸***** 작성자

재밌네요 ㅋㅋ 다음생에는 남자로 태어나볼께요

경찰청 · l*********

불수능이면 97이려나 난 중학교때까지 끝에서 놀았는데 그래도 무협지같은 소설이랑 신문사회면 사설같은거 보는걸 좋아했었거든 그러다 고등학교 갔는데 처음 본 수능 모의고사가 반에서 중간 이상 갔네? 그때부터 살짝 깨우치고 조금씩 공부 시작한거 같어

슈카도 얼마 전에 글읽기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 하더라
그래서 나도 애한테 공부는 안해도 책을 읽지 않는 날은 없도록 하고 있음

의사 · 졸***** 작성자

책만 읽어도 80점은 되는 것 같아 문자 보는거 좋아하는 사람이랑 티비 같은 영상 보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랑 다르더라고 그렇게 책 보는걸로 혼난 나도 지금은 핸폰을 손에서 떼지 않는데 심지어 어릴때 핸폰부터 봤으면 하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애 잘 크기를!

의사 · n*****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정석만 판건 아니지만 정석 보면서 이것저것 풀어보고 들어왔는데 추억이네요. 의대 1년이라도 빨리 졸업하는게 맞다는데도 동의합니다 ㅎㅎ

의사 · 졸***** 작성자

그쵸 의대는 무조건 하루라도 빨리 졸업해야죠 이제 전 길을 바꾸기에 나이도 있어서 걍 이대로 살긴 할텐데 암튼 선생님도 홧팅입니다 바쁜 월요일 고생하셨습니다

의사 · 졸***** 작성자

키는 작습니다 ㅠ 다음생에는 남자로 태어나든지 여자로 태어날거면 연경언니처럼 태어나고 싶어요 형님은 키 크신가요?

국민건강보험공단 · a*****

나랑비슷한세대네.. 글 잘 읽었어요.. 글을 읽으면서 머리에 그림처럼 그려지네요 ㅎ 멋져

의사 · 졸***** 작성자

부족한 글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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