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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원과 보육원

삼성SDS · 그********
작성일2021.07.04. 조회수1,753 댓글11

언젠가 어떤 여자가 배가 부른 체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미혼모 시설을 찾았다. 그 여자가 슬퍼하며 시설로 왔을 지, 아무렇지도 않게 시설에 왔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녀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아비없는 아이를 낳았고,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여자가 낳은 아이가 나였다. 나를 이뻐했던 간호사가 내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이름은 은근히 나쁘지 않았고 아직도 나는 누가 그 좋은 이름을 지어주었냐는 질문을 받는다. 철이 없었던 시절에는 내가 태어났던 병원의 간호사가 작명하였다고 솔직히 답하였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나를 잘 아는 어른이 이름을 주었다고 말을 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간호사는 이제는 아주 나이가 많을테니 틀림없이 어르신이었을테니까.

그런 내가 자랐던 곳은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이었다. 나는 내 어린시절을 함께 했다는 곳이 고아원이라는 사실을 의외로 상당히 늦게 깨달았다. 왜 그런지 보통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유치원 때 아무것도 모르고 달걀 하나를 못먹어 울음을 터뜨리며 보육교사에게 매달리고, 곯은 배를 매만지며 산타 클로스가 있을거라고 믿으며 자랐던 아이는 자기 자신과 고아라는 단어를 연결하지를 못했다. 내가 내가 고아라는 사실을 알았던 순간은, 초등학생 때, 후원물품으로 온 겨울 잠바 상자에 커다랗게 '고아원'이라는 글자가 매직으로 써있었을 때였다.

그것을 본 수녀님들은 참 그 사람이 눈치도 없다고 화를 내며 소리쳤었다. 그 광경을 본 내 나이가 아마... 초등학교 3학년일 때였으니 열살 갓 넘었을 것이다. 나는 적당하게 눈치가 있었고 그 호통을 들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고아원'이 적힌 상자를 옮길 센스가 있었던 나이였다. 솔직히 센스가 있어서 조용했기보다는 '고아원'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몰라서 아무렇지도 않았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건대 수녀님들이 그렇게 호들갑을 떨 이유가 있었다. 사과 상자보다 더 큰 상자에 적힌 그 문자는 너무 크고 존재감있게 띄어쓰여 있었다. '고아원'이 아니라 '고' '아' '원' 이라고 따로따로 써진 것 같았다. 내가 아직도 기억할 만큼 크고 강렬한 굵기와 절제가 있었다.

그 때를 제외하고는 나는 단 한번도 내가 자랐던 곳이 고아원이라고 들은 적이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나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수없이 듣고 느꼈던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던 아이가 어느날 어머니 혹은 아버지한테서 '실은.. 너는 부모님이 있는 가정에 자랐단다' 라고 들은 적이 없는 것과 똑같다. 나는 내가 아주 이상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가끔씩 어떤 사람들이 나를 너무 측은하게 보는게 싫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고아원이라는 단어는 금기시 되고 사장되었으며 그나마 죄책감을 가지고 머뭇거리며 말하는 단어가 그거였다. '보육원'.....

나는 아직도 고아원과 보육원 두 개의 단어 사이에서 우왕좌왕한다. 내가 당혹스러워 했던 사실은, '고아원'이라는 단어에 상처받는 이는 내가 아니라 건너건너 내 이야기를 알게 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쨍그랑 깨져버릴 얇은 유리 조각상처럼 어쩔 줄 몰라하면서, 어쩌다가 불가피하게 내가 자랐던 장소를 표현할 때면 '거기', '그 곳' 이라는 표현으로 뭉뚱거렸다. 나는 그들의 배려가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먼 옛날에 수녀님들이 보였던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모든 사람이 죄스러워하는 모습이 오히려 이상했다.

지금은 왜 그런지를 낱낱이 알게 되었다. 언제 그 어느 때이든 내가 주변인들에게 부담을 주는 잘못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불행하게도 상당히 늦은 시기에 깨달았다. 내가 깨닫기 전까지는,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대신해서 그 수치와 죄책감을 대신했다는 것을. 어린 시절에는 수녀님이 그러했었고 더 컸을 때는 내게 동정심을 품었던 대모님과 대학 친구들이 그러했다. 지금은 그들에게 너무도 미안하다. 나는 지금은 고아원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이 왜 고아원이라고 하지 않고 보육원이라고 애써 말했는지 알아서...

내가 자란 곳을 죄스러워 할 나이가 되었기 때문에. 나 자신보다 나를 아끼는 사람들 때문에 더 이상 고아원이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보다 더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인데.

#고아원

댓글 11

스타트업 · l********

이러면어떻고 저러면어때 잘커서 잘살고있다는게 중요한거지

LG화학 · 마******

정말 열심히 살아오신게 글에서 보여요!
항상 좋은일만 가득하시길 응원할게요.

영원무역 · s******

글 너무 잘쓴당! 책 많이 읽나바

새회사 · 힁*

오랜만이야 글 잘 읽어보고 있었어. 이렇게 실시간으로 글을 본 건 처음이라 조금 가슴이 두근거렸어!

새회사 · 좋*******

고아원. 보육원. 가본적은 없지만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자란곳인걸 보면, 따뜻한 곳인가봐요...

새회사 · i********

왜 아이들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상황이 되는지 이해가 안돼..애들은 죄가 없는데..

스타트업 · !*********

그 아이가 보고싶네요 ㅠ

롯데건설 · i*********

재밌다 사랑해 네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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