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원
나는 미혼모의 자녀로 19년을 고아원에서 자랐고 그리고 내 고아원 동기들은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사는 녀석들이었다. 누구는 내가 이렇게 글을 쓰면, 니 동기들의 삶을 네가 어찌 재단하느냐고 펄쩍 날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내가 내 동기로부터 직접 들은 말이었다. 성년이 될 때까지 결코 누구도 사랑할 일이 없었던 나와 다르게, 내 친구들과 동기들은 누군가를 피 뜨겁게 사랑하고 원했다. 그 결과는 결코 아름답지 못했음에도 아직도 그게 좋았노라고 말하는 녀석들이 나는 아직까지 한심했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기
삼성SDS · 그*****
나는 미혼모의 자녀로서 기인해 태어나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부모없이 자랐다. 내가 태어나서 최초로 무엇을 보았는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태어나서 내 부모를 보았던 적이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나는 내 이름을 지어준 간호사만큼은 명확히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다들 예상했던 바와 같이 나는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서 많이 회의적인 편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 듣는다면 다들 적든 많든 어느 정도의 불쾌감을 드러내었다. 그 이유가 내 사랑이 어느 누구의 고통이나 슬픔을 빚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들이는 리소스 대비
삼성SDS · 그********
#22 랑 #고아원 각각 BCG랑 삼성SDS 다니는 사람인데 #22는 어느순간 그동안 쓴 글 다 지우고 사라지심 ㅜㅜ 왜인지 이유 아는 사람? 그리고 저 두 분처럼 글 잘쓰는 사람 알면 댓글로 태그 알려줘
서울특별시 · l*********
나는 유년기의 19년 동안의 세월을 고아원에서 보냈고 그 덕에 일반적인 가정의 모습을 모르는 채로 평생을 보냈다. 나는 초등학생 때 내 이름을 지어준 간호사를 만났고 그 때 내 생모를 아주 조금이나마 그려볼 수 있었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시설에서 정해주는 공고에 입학할 때, 나는 복지사로부터 어떤 사람들에게는 어머니를 한번도 만나보지 않은 것이 축복일 수 있다는 이야길 들었다. 그후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은 그 명제 하나를 증명하기 위함이나 다름없었다. 그 때 그 사람이 내게 잘못 말한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아
먼저 나에 대해 간략히 써보자면, 수녀원이 운영하는 고아원 산하의 미혼모 시설에서 태어나서 19년을 고아원에서 보낸 사람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성장기동안 일반적인 가족을 경험한 적이 단 한번도 없는 사람이다. 아니,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 표현도 틀렸다. 나는 그냥 가족이란 걸 모르는 것 같다. 어떤 가족이 일반적인가, 아닌가 판단할 수도 없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우리에게도 가족 비슷한 것이 있었다. 우리 고아원은 수녀원이 운영했는데, 이삼십명의 동년배 아이들이 한 방에서 자랐고 그 방을 침방이라고 불렀다. 방을 담당하는
나는 태어날 때부터 고아원에 있었다. 성장한 뒤에 알게 된 사실인데, 내 어머니는 미혼모로, 수녀원 산하의 미혼모 시설에 있다가 나를 낳고 퇴소하였다. 내 이름은 내가 태어난 병원의 간호사가 지어주었고 나는 그 후 19년 가까이 고아원에서 살았다. 우리 고아원은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이었다. 고아들이 자라는 방 한개를 침방이라 불렀고, 각 침방에는 침방 수녀님이라는 관리자가 붙었다. 아주 어렸을 때에는 그를 엄마라 불렀다. 그러나 좀더 자라, 우리의 처지를 실감하게 되었을 때부터 나는 엄마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 이유
나는 수녀원 산하의 미혼모 시설에서 몸을 푼 미혼모의 아이였다. 몇몇 사람의 기대와는 다르게 나는 태어나서 내 생모의 얼굴을 한번도 본적이 없었으며, 심지어 단 한번도 그리워 한적도 없었다. 물론 그녀는 출산 직후 나를 보았을 수는 있었겠지만 그것이 무슨 대수였겠는가. 삼십년 가까이 나를 찾은 적 없는 사람은 결코 내가 자신을 찾는 것을 바랄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혈기 넘치는 십대 후반까지 나는 헛된 희망을 품었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선 나는 감히 말한다. 나는 이제는 의연하다고. 중고등학생 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내가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나 19년을 고아원에서 자라면서, 가장 정의하기 힘든 관계는 바로 수녀님과의 관계였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내게 수녀님은 자비로운 성모였고 잔인한 블러디 메리이면서 때로는 완벽한 타인이었다. 중국 극술의 한 종류인 변검술을 아는가? 그것을 보면, 단 1초만에 수개의 가면이 바뀐다. 그 광경을 성인이 되어 보게 되었는데 우습게도 나는 그를 보며 어렸을적 수녀님들을 떠올렸다. 우리 고아원은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으로, 8살 이전에는 한 보육사와 수녀님이 몇년을 한 아이를 기르다가, 그 아이가 8살이 되
나는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나서 19년동안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성장하면서 겪었던 시간 중에, 아프고 쓰릴 때도 있었지만 은근하게 그리운 시절도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 시간들을 떠올리면서 울고 웃고 한다. 우리 시설에는 내가 짐작치 못할 유구한 전통이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여름날이 되면 고아원 원생 중 일부를 뽑아 양산의 대단위 밭으로 작업을 보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중학생 고학년 이상의 시설 원아에게 고추밭과 같은 밭일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다. 실제로 내게도 그랬다. 왠만한 밭일은 힘들지 않
나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갓난쟁이일 때부터 고아원에서 자랐다. 나중에 알고보니 내 생모가 미혼모였고 수녀회 산하의 미혼모 시설에서 나를 낳았다고 한다. 그 사실이 가슴아프다던가 못내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나는 해가 뜨고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그저 태어나서 살았을 뿐이었다. 장성하여 퇴소하고도 한참 후에야 나는 내가 고아원에서 자란 고아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항간에서 흔히들 그리는 고아에 대한 이미지를 알고 나서 깜짝 놀랐는데,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과 그 이미지는 뭉크와 클림트의 그림 만큼의 간극이 있었
나의 엄마는 미혼모였고 나는 가톨릭 수녀원 산하에서 운영하는 미혼모 시설에서 태어났다. 고아원에서도 계급을 나눈다면 아마 아래에서 제일일거다. 골품제도로 따지자면, 태어날 때부터 고아원에서 자란 성골 고아라고 할 수 있겠다. 가끔 내가 은근히 자조하는 비유이다. 그런 내가 자란 우리 고아원은 폐쇄적인 고아원이어서 초중고교를 법인에서 모두 다 같이 운영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또래 바깥 사람들을 만날 일이 좀처럼 없었다. 그렇게 같은 나이의 고아원 동기가 100명 정도 하는 대단위 고아원 안에서
내가 19년을 고아원에서 지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자면, 몇가지 기억들을 생각하면서 고민하겠지만.. 가장 잊혀지지 않는 행복한 순간은 단연코 그 날일 것이다. 어느 해의 어린이날이었다. 우리 고아원에서도 어린이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전날부터 만국기를 붙인 운동장은 녹음과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우리는 새벽부터 설레어서 하얀 새벽녁이 밝아올 무렵이면 체육복을 입고 팔딱팔딱 뛰었다. 그렇게 오전 8시가 되면 어린이날 기념 운동회를 했는데, 전국에서 찾아주신 후원자분들이 있어서 그런지 전혀 쓸쓸하지 않았다. 장애물
언젠가 어떤 여자가 배가 부른 체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미혼모 시설을 찾았다. 그 여자가 슬퍼하며 시설로 왔을 지, 아무렇지도 않게 시설에 왔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녀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아비없는 아이를 낳았고,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여자가 낳은 아이가 나였다. 나를 이뻐했던 간호사가 내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이름은 은근히 나쁘지 않았고 아직도 나는 누가 그 좋은 이름을 지어주었냐는 질문을 받는다. 철이 없었던 시절에는 내가 태어났던 병원의 간호사가 작명하였다고 솔직히
첫사랑은 피할 수 없는 천재지변과 닮았다.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를 피할 수 없고 또 어느 순간 느닷없이 정전이 될 때 당황할 수밖에 없듯이, 첫사랑은 내 이성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야생동물처럼 행동했다. 그것은 내가 연애를 금지하는 엄격한 가톨릭계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랐는데도 찾아왔다. 내가 그 사랑 때문에 불의로 생겼을 미혼모의 아이였음에도 아랑곳하지않고 공평하게 나를 찾아왔다. 하지만 내 첫사랑은 모두에게 아무일도 아닌 것처럼, 그리고 내게도 아무일도 아닌 것처럼 넘어가야 했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비참한
나는 미혼모 시설에서 태어나 19년을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내가 고아원 바깥으로 나와 가장 충격을 받은 사실 중에 하나는, 보통은 자식이 부모님에게 반말을 한다 것이고(같은 연배 어른한테는 극존칭을 하는데 도대체..)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극도로 지탄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나에게 부모님은 수녀님들 밖에 없었다. 그분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미움받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했다. 나는 나를 키워준 수녀님들을 전부 기억한다. 장안나 수녀님, 박아가다 수녀님, 오카타리나 수녀님, 수산나 수
고아원, 다른 말로 아동복지시설에서 살았던 19년의 세월을 한 때는 고단하다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은 말이지, 가끔 그 시간들이 그리워져. 그 때의 꿈을 꾸면 악몽을 꾼 것처럼 깰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마치 라파엘로의 성화를 본 것처럼 마음이 아리어. 우리는 매일 새벽 5시 반에 기상했어. 기상음악도 성가였지. 서둘러 세수를 하고 오면 아침기도야. 나는 아직도 외울 수 있어. 하느님 저를 사랑으로 내시고 저에게 영혼 육신을 주시어 주님만을 섬기고 사람을 도우라 하셨나이다... 그런데 새파란 15살 청소년이 그런 기도가
삼성SDS · 그****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나 고아원에서 자랐고 커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된 지금에야 과거를 고백해본다. 어렸을적 가톨릭계 수녀원에서 자라, 나는 사랑이란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배웠다. 우주와 대자연을 만드시고 우리를 창조한 하느님 아버지가 나를 용납하신 이유는 오로지 사랑이었을 것이리라. 내가 배운 사랑은 주는 사람이 없어도 홀로 감격하는 그런 괴상한 종류였다. 신은 모든 사람을 굽어살필 수가 없어 어머니를 보내셨다는데, 그럼 우리는? 신께서 직접 살피시는 건가요? 이런 순진한 말이다. 나는 그저 내가 홀로 감사하면 어느새
나는 태어날 때부터 고아원에 속해, 지금껏 평생을 부모를 모르고 자랐다. 내가 지금까지 엄마를 불렀던 횟수는 내 상사를 부른 횟수보다 적을 것이고 아빠를 찾은 횟수는 한번도 없었으며.. 내가 숨을 쉴 미래의 나날에도 그를 부를 수 있는 날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엄마라는 존재는 대체 무엇이고 아빠는 왜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흔히들 고아원, 보육원 아이들은 부모를 그리워하거나 결핍하며 외로워하는 아이일 것이라 상상하는가보다. 나는 퇴소 후 일반적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과 대화하며, 또는 미디어에서의 보육원이라는 소재를 보면서
나는 SDS에 입사하기 전, 19년을 보육원에서 보냈었다. 누군가에게 듣기로 내 어머니는 시설에서 운영하는 미혼모 시설에 몸을 푼 미혼모였고 나는 첫울음을 터뜨리는 순간부터 보육원에서 숨을 쉬게 되었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 있겠지만.. 보육원에서의 19년은 그렇게 아주 불행하지도 않았고 아주 행복하지도 않은 평범한 나날이었다. 때때로 울고 때때로 웃었다. 자주 외로웠지만 그것때문에 힘든 적은 없었다. 어쨌든 그 세상엔 나와 같은 처지의 아이들과, 똑같이 외로웠던 수녀님들이 함께 했었기 때문이다. 이맘때쯤엔 쑥을 뜯고,
나는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나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성인이 되어 한창 철이 없을 때는 조금만 친해져도 나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솔직히 내 과거는 나에게 있어서 엄청 슬프거나 한게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듣는 상대방은 좋게 듣다가도 말하는 나보다 더 괴로워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었다. 흡사 내가 사이코패스가 되어 여린 소녀를 괴롭히는 그런 느낌이었다. 어느 때부터 나는 내 과거를 감추었고 설사 누가 양친에 대해 물어보더라도 코끼리를 설명하는 옛 중국인들처럼 얼머부렸다. 그런데 나는 얼마 전 술자리에서 나를
나는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나, 수녀원 산하의 병원에서 태를 끊어 울었다. 내 이름은 병원의 간호사가 지어주었다. 내게는 그것이 큰 비극이 아니었다. 자라면서 만날 고통이 더 컸을테니까. 우리 고아원에 언젠가 푸른 눈의 외국인 봉사자가 방문을 하였다. 그것은 우리같은 어린이들에게는 큰일이었고 어른들에게는 늘상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왜냐면 우리 고아원의 정체성은 사실, 외국인으로부터 왔기 때문이었다. 키가 멀거머니 큰 미국인 신부는 한국전쟁 후 한국에 와서 우리 고아원을 설립하였고, 독일의 독지가는 그 사정을 듣고 안타까워 거금
어느날, 별거없는 초등학생 고아 몇 명 앞에 책임감이 투철한 교사가 무릎꿇고 빌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엄청나게 큰 일같이 느껴지겠지만 그 일은 같은 고아였던 내 귀에서만 크게 울렸고 곧 아무 일도 아니게 되었다. 그 선생님은 마산에서 온 마선생님이었다. 당시 마산은 매우 부자가 많은 지역이라 몹시 교육열이 높았는데 어떠한 사명감을 갖고 우리 시설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부임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시설은 원생들을 별도의 교육시설에서 교육을 받게 했다. 즉 전교생이 원생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를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얼마전 블라인드에 글을 쓰고 고아원에서 좋은 직장에 갔다는 그런 댓글을 보았다. 아마 나같은 고아를 처음 보는게 아닐까 싶다. 나는 내가 자랐던 고아원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공부를 잘했던 원생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어떤 아이라도 나와 같은 경험을 겪는다면 나처럼 공부에 매달리는 아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 그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한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에 꾀죄죄하고 마른 몸을 가졌기 때문에 단 세명의 아이와 함께 있더라도 주목받지 못할 그런 아이였다. 그리고 나는 오십명이
나는 태어날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고아원에서 자란 고아이다.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건 내 생모가 고아원 산하의 미혼모 시설에 몸담았던 미혼모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20년동안 고아원에서 살았던 나는 요즈음 MBTI 광풍이 부는 걸 보면 의아하기만 했다. 그게 그럴만큼 센세이셔널한 것인가? 왜냐하면 MBTI가 이렇게 인기를 얻기도 전, 수십년 전에 우리 고아원에서는 이미 매년 MBTI 검사를 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고아원에서는 중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에 어떤 기관에서 전체 기수가 MBTI검사를 받았었다. 그 검사는 강압적인 것
나는 수녀원이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미혼모의 아이로 태어났다. 아주 오래 전에 정신차려보니 내 주변에는 금방 나를 떠나보낼 보모와 나를 울게 만들 형제 자매들이 있었다. 그 어떤 사람이든 내 가족이 아니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고아원 아이가 처음 맞닥뜨리는 차가운 현실은 초등학생 때 일어난다. 처음보는 아이들, 처음보는 콘크리트 시설건물, 처음보는 수녀님들의 시선, 처음 겪는 고아원의 하루 일과. 매일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아침기도를 하고, 일곱시쯤 식빵배식을 받고 매일 먹는 뻑뻑한 빵과 우유를 겨우 삼키고 시작하는 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방금 썼지만 그냥저냥 행복했던 순간은 상당히 많았어요. 단순히 급식 우유.. 두개 받아서 좋았던 때도 있었고 길에서 주운 동전으로 간식사먹고 자판기 율무차 달콤하게 먹었던 순간도 좋았고 바자회에서 군것질하고 또 물건구경하다가 후원자분들이 선물했던 선인장 어항이 너무 좋았고 수녀님들 몰래 만화 봤던 것도 좋았고.. 쓰다보니 행복했던 순간이 많답니다. 글로 다쓰기 힘드네요. 고아원에서도 이렇게 행복했던 순간이 많다는 것.. 솔직히 말을 잘안해요. 그냥 본능적으로 아는 거죠. 눈치가 참 빠르죠? 좋게
오늘도 보육원 퇴소 아동에 대한 어떤 뉴스기사를 보았다. 만 18세가 되어 지원금을 받고 퇴소한 아동이 어떠한 어려움을 겪는지에 대한 기사였다. 나는 어쩌면 가장 생생한 경험을 알려줄 수 있는 샘플이었다. 우리 시설에서 몇되지 않은 대학교 진학생이었기에, 나의 동기들이 이불짐을 짊어지고 떠나고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를, 그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제3자의 입장에서 알려줄 수 있는 희소한 개체였으리라. 우리 고아들은, 사실 고등학생 3학년이 되는 순간 취업전선에 뛰어든다. 대체로 기숙사가 있는 공장으로 가는데, 여자들은 반도체 공장
19년을 고아원에서 살면서 작성한 나의 수기는 어쩌면 내 본위의 이기적인 토로에 불과할 수 있다. 나는 단 한명의 고아로 살면서 나를 지배했던 고아원의 공기를 원망했을 뿐, 나와 함께 살았던 어른들의 고통에는 무지했다.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어렸을 때는 몰랐고 좀더 커서는 그를 변명했으며.. 더 커서도 나는 그저 내 행위를 정당화하기 바빴다. 이제와서 세례명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수녀님은 그렇게 고아들을 위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중학생이 되어 몰래 오가던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주변의 골목집 분식집은 고아들이
저는 미혼모의 아이로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고아원에서 지냈어요. 고아들 사이에서 계급을 매기자면 아마 진골일거에요. 태어날 때부터 고아원에 있었는데 그래도 세상 어딘가에 내 엄마가 살아있을 수 있으니까요. 내가 자랐던 고아원에는 이따금 자원봉사자분들이 왔는데요, 하루만 온 봉사자들도 있고 주기적으로 오시는 봉사자들도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다들 고마운 분들인데, 그래도 시간이 지나도 계속 애타게 생각나는 사람은 가끔이라도 계속 오셨던 봉사자들이었어요. Jason이 그런 봉사자 중에 한 사람이었죠. 그리고 특이하게도 그
여러번 반복해서 쓰는 글이라 부끄럽기도 하지만, 나는 고아원 산하의 미혼모 시설에 온 어머니의 자녀로 태어나 평생을 고아로 살았다. 우리 고아원은 한국에서 내로라할 크기의 시설로, 나는 일반인들보다 훨씬 많은 형제자매들과, 그리고 이모들과, 엄마수녀님들을 만났다. 수녀님들은 내게 모든 것을 가르쳤다. 사랑과 체념과 분노와 고통, 그 모든 것들이었다. 우리 고아원은 꽤 유명해서 여기저기서 후원이 들어왔다. 어렸을 땐 몰랐는데 커서는 그것이 그런것임을 알았다. 나는 그린피스의 북극곰이었고 월드비전의 난민이었다. 내가 초등학생
나는 고아원 산하의 미혼모 시설에서 지낸 엄마의 자녀로 태어났다. 그 사실을 초등학생 때 알았고 그게 벌써 이십년도 지난지 오래다. 때때로 누구를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거 엄마인 것 같았다. 멀리있는 엄마가 부담스러워 할 거 같아 하고 싶은 말은, 나는 정말로 보기만 하고 싶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멀리서 그냥 아무말없이 조용히 볼 수 있을 것 같다. 잘 살고 있으면 그대로 좋고 불행하게 살고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좀 마음이 아플거다. 어쨌든 난 그냥 아무말 없이 보고 싶었
내가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나 19년을 살았던 고아원은, 지역사회에서도, 전국을 통틀어서도 유서깊고 규모있는 고아원이었다. 그렇다는 것인즉, 알게 모르게 많은 후원자들이 있고, 후원물품이 있다는 뜻이다. 모든 후원은 고맙고 은혜로운 것임을 알지만, 가끔씩 그렇게 감사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지금은 유머코드인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나는 20년 전 구역질하면서 먹고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 고아원의 배식 체계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가장 큰 특징은 '주는 대로 먹고, 잔반은 없다'는 것이다. 보통 세종류 기본찬에, 메인 요리나 국이
내가 19년간 자라난 고아원은 전국에서 손꼽을만큼 규모가 있는 시설이었다. 당연히 여러명의 관리자가 있었고, 총원장 수녀님과 총대리 수녀님, 시설장 수녀님과 부원장 수녀님이 계셨다. 그 중에 총대리 수녀님은 총원장 수녀님을 대리하는, 내가 있던 지역의 원장수녀님이었다. 수녀모 슬라이 밑으로 까만 머리와 엄격한 가르마가 있었고, 입매가 모로 닫혀져 그 엄격함이 그대로 보이는 그 분은 공포의 상징이었다. 침방 수녀님들은 내내 아이들과 부대끼며 희노애락을 겪지만 원장수녀님은 차가운 흰색 사각벽의 사무실에서 상주하며 때로 올라오는 초특
전에도 자주 말했던 것처럼, 나는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나 고아원에서 자라 평생을, 지금까지 부모를 모르고 살았다. 누구는 이런 나를 보고 가엾다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자라며 나보다 훨씬 불쌍한 사람들을 보며 자랐다. 너무 위의 사람들은 한계까지 내려보아도 나 정도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불쌍하고 슬픈 이들이 있다. 나는 몸이 약해 어렸을 적 자주 병원에 입원했다. 하루는 너무 아파 구토를 하고 곧바로 누웠던 적이 있었다. 몇시간 뒤에 나는 깨어나 침방 수녀님의 꾸중을 들었다. 바닥에 토하고서는
[Blind] 블라인드에 올라온 글 보셨어요? 고아원의 고아가 나방을 특히 싫어하는 이유 (블라블라) https://kr.teamblind.com/s/kpByrBCY 위가 제가 썼던 글이고 아래가 관련해서 뉴스에 나온거네요. https://www.ilyosisa.co.kr/mobile/article.html?no=232469 무언가 표현할 수 없는 진흙탕같은 감정이 온몸을 훑고가는 것 같습니다. 조금도 시원하지 않고 조금도 슬프지 않은 그저 낡고 얇은 사진에 손가락이 베이는 것과 같은 그런 기분이네요.. #고아원
영화에서의 많은 주인공들은 놀랍게도 고아가 많다. 특히나 히어로들은 툭하면 고아들인데, 현실에서의 고아들의 취급과 비교하면 놀랄 수 밖에 없다. 나는 어려서 영웅을 꿈꾸었다. 그런 꿈을 꾼 고아는 비단 나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아원에서 함께 자란 나의 동기들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며, 나는 어쩌면 영화 속의 고아 히어로들은 절대 존재하지 않으리란 생각을 한다. 의지와 용기가 굳셀수록, 그 고통과 좌절도 크니까. 전에도 몇번 썼지만, 나는 우리 고아원 역사상 가장 공부를 잘했던 고아였다. 이것은 자랑이 아니라, 나
나는 미혼모의 아이로 태어나 19년의 세월을 보육원에서 홀로 부대끼며 살아왔다. 그말인즉슨 내가 기억하는 한 누군가가 나를 온몸으로 안아준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말이다. 나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자라왔다. 나는 가톨릭 성당에서 바티칸의 성종을 울릴 수 있는 성인 성녀가 아니었고 또 득도하여 우주의 원망을 삭일 수 있는 보리수 나무 아래의 싯타르타도 아니었다. 그 고통과 부족을 누군가에게 미루어 원망하지 아니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내 고통이 모두에게 같은 줄 알았다. 모두가 나와 같아서, 오히려 내가 그들의 고
자주 쓰는 글로, 나는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나 아동복지시설에서 자라 현재까지 부모를 모른다. 여기서 혹자는 궁금하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고아원에서 자란 고아가, 어떻게 자신이 미혼모의 자녀임을 알 수 있었을까? 나도 솔직히 초등학생 때 발생한 그 행운이면서 불운한 사건만 없었다면 내가 미혼모의 자녀임을 평생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말 그대로 나는 정말로 태어날 때부터 고아원 산하의 병원에서 태어났고 내 이름은 나를 받은 간호사가 지었다고 한다. 이는 내가 몸이 약해 초등학생 때 병원에 입원했을 때 재회한 간호사가 해준 말
나는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나 19년을 고아원에서 자랐다. 내가 태어나 첫울음을 터뜨리는 그 순간부터 나는 고아원에 속할 운명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떠났고 내 이름은 고아원 산하 병원 소속의 간호사가 지어주었다. 나는 그 사실을 채 열살이 되기 전에 알게 되었다. 지금와서 돌이켜보건데 추석은 어디든지 찾아온다. 그것은 심지어 고아원에도 자비롭게 들러주었다. 나는 고아원에서의 추석들을 거의 다 기억하고 있다. 그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추석이 있다. 젤마나 수녀님과 보냈던 추석이었다. 우리 고아원은 고아들을 매년 담당하는 수녀님이
혹시 가증스럽다는 감정에 대해서 아시는 분이 있는지요? 그것을 누구에게 느꼈는지요? 아마.. 많이 가까운 분에게 느끼지 않았을까요. 저는 그런 표현을 고아원을 나와서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배웠는데, 그 때 가증스럽다고 생각하면서 그런 생각을 한 제가 참 철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아동복지시설에서 자랐는데, 그 복지시설은 가톨릭계 수녀원이 운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랜 기간 동안 수녀님이 담당해서 키워주셨습니다. 우리를 담당하는 수녀님은 1년 단위로 바뀌었는데, 그 때마다 저는 혼란스러워하면서 그분들께 잘보일려
우리 고아원은 신생아부터 만 19세 전 아이들까지를 모두 커버하는 고아원이다. 심지어 19세를 지나 대학생이 되어 오더라도 너그럽게 품어주는 시설이었다. 우리 시설은 수녀회에서 운영했으므로 침방 수녀님을 엄마 수녀님이라 불렀고, 그 외에는 이모 수녀님이었다. 특별한 위치에 있는 시설장 수녀님, 원장 수녀님, 총원장 수녀님은 별도로 부르기는 했으나 전체적인 맥락은 모계 칭호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부계에는 무지했다. 아버지는 하느님 아버지이고 그 외에는 없었다. 오죽하면 초등 교과서에 있는 아빠라는 단어는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나 30년에 이르는 지금까지 부모님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본인은 꿈에서 가끔씩 부모님을 볼 때가 있다. 기대에 어긋날 수도 있는데, 내가 꾸는 꿈의 장르는 보통 SF다. 나를 낳은 부모님이 사실은 외계인이라던가.. 내가 말머리 성운에서 태어나 플레이아데스 성운을 침식하고 달이 지구에 충돌하려고 하는데 내가 나타나 막고 지구에 강림해서 한낱(?) 인간으로 자라난다. 근데 가끔 평범하게 꿈을 꾸고 평범한 엄마를 볼 때가 있는데.. 그런 꿈을 꿀 때마다 그 엄마란 사람은 어찌나 불쌍하던지.. 막 힘들게
고아원 산하의 초등학교에서, 꿈에 대해서 그림을 그리라는 주문을 받고 나는 매우 황당해졌다. 그리고 그 꿈은 밤에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미래에 보고 싶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나는 과학자를 그렸다. 그 과학자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또 사랑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그로 인해 살기 편해지고 그에게 감사를 표했을 것이다. 과학자는 쓸모가 많아서 이제 세상에서 안심하고 살 수 있었다. 미래의 나는 그렇게 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의 나는 꾀죄죄하고 마른 몸을 가지고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고아였다. 나도 사랑스러운 모습을
19년을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지내면서 익숙해질 수 밖에 없는 두개의 성스러운 날이 있었다. 4월의 부활절과.. 12월의 성탄절이었다. 부활절 때보다 성탄절 즈음 유독 서럽고 슬픈 일이 많았던 것은 그것이 겨울에 있던 까닭이 아니었을까 싶다. 춥고 아프고 고달픈.. 지금에야 아름답고 행복한 날이라고 싸매기 바쁘겠지만.. 조금 오래전에 그날은 아기 예수가 태어나 누웠다던 구유처럼 초라하기 그지없는 날이었다. 우리 고아원은 가톨릭계 수녀원이 운영하는 고아원이었으므로 성탄절 미사만큼은 바티칸 못지않게 크고 성대하게 열렸다. 4
보육원이라는 단어가 어색하지마는, 요즘은 아동복지시설이라던가, 고아원이라는 말보다 보육원이라고 하더라고. 나는, 가끔은 궁금해. 보육원에 봉사활동하는 좋으신 분들이 불쌍한 아이들의 더러운 면까지 보듬어줄 수 있을까하고. 나는 태어날 때부터 보육원에서 자랐는데, 여기서 중학생이 될때까지 뗄 수 없었던건 머릿니였어. 머릿니는 피를 빨고, 좀 보지 않으면 머리카락에 하얗게 알을 놓았어. 그걸 서캐라고 부르지. 수녀님들은 기겁하고 머릿니를 잡으려고 애를 썼는데, 참빗을 써서 빗어도, 샴푸를 써도 줄어들지 않았어. 그저 할 수
우리 시설, 다른 말로 고아원에서는 옛적부터 수녀님이 사감같은 역할을 했다. 수녀님들과의 친분관계는 머리가 무른 어릴시절에 고점을 찍다가 질풍노도일 때 눈물을 쏟다가 다시 고교시절에는 같이 추억을 쌓는 그런 관계였다 우리는 매년 담당하는 수녀님이 달라졌는데 그는 수녀님들을 배려해서든, 우리가 철이 없어어든, 어차피 헤어질 정이라 우리가 정들지 말라는 차가운 사랑 때문이었으리라. 아가다 수녀님은 내게 고교시절 가장 기억이 남는 수녀님이었다. 그분은 차가운데 가끔 토라지고, 그런 와중에 기도하는 모습이 위태로웠고 결코 우리한
IT인으로서 부끄럽게도 블라인드에서 태깅을 드디어 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썼던 고아원 관련글에 모두 #고아원 이란 태그를 달았습니다. 익명을 빌어, 그리고 술을 빌어 썼던 글이라 부끄럽지만 위안을 얻습니다. 의외일 수도 있겠지만 고아였던 제가 만난 사람들의 대부분은 상냥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만, 너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랐던 사람들이 많았지요. 블라인드를 보면 그와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때로 악하지만, 대체로 선함을 추구하며 또 상냥하다는 것을 블라에서 배웁
그 곳은 내가 미혼모의 아이로 태어나면서부터 살게 된 고아원이었다. 거기에 고아와 수녀님이 함께 살던 곳이 있었다. 때때로 외로움이 묻어나는 그 곳. 낮에는 식사준비와 청소와 설거지 그리고 TV소리가 나던 그 곳. 밤 10시가 지나면 조용해지고 간간히 우는 아이의 서글픈 목소리가 그리고 때로 새벽녁 수녀님들의 기도소리가 들리는 그곳. 낮의 번잡한 소리는 가볍게 행복하고 밤의 침묵은 무겁게 외로운 그 곳. 때로 얼굴을 붉히면서 서로 싸우고 상처입히고서는 고아와 수녀 둘 다 잘못했다며 혼자서 가슴을 치는 그 곳. 그러면서도 기
우리 아동복지시설은 가톨릭 계열이었으므로 미사를 주기적으로 했다. 매주 일요일 아침만 미사를 하다가, 수요일까지 미사를 하는건 너무하다 싶으면서도 한편, 익숙해지니 그것 마저 위안이 되는 게 우스웠다. 미사는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순명과 순종을 말하는 말씀의 전례는 한번도 좋았던 적이 없었다. 제 1독서와 제 2독서를 지나, 엄격한 신부의 강론은 때로는 나를 괴롭혔다. 모든 것은 나의 욕심 때문이라며 스스로 택하지 않은 희생은 억울함으로 나의 심장을 펄쩍 뛰게 만들었다. 그 때 들은 욥기의 욥이 불쌍할 따름이었다
나는 어려서 순진할 때에 여러 세계 명작을 읽으며 줄곧 상상했었다. 내가 더 슬프고 고통스럽게 울면 세상의 어떤 착한사람이 알아봐 줄거라고. 그래서 고아원에서 어린 시절 나는 언젠가 힘차게 울었고 혼이 나서 울음을 그치곤했다. 그게 반복되니 나는 세상을 알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누가 우는 소리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누군가 우는 소리를 조금이나마 들을 수 있는 위치에까지 올라왔다. 그 때에 우는 내게 아무도 부드럽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감히? 공개적으로 운다는 것은 드럽고 추접스런 것이었고 이불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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